초판발행 2026. 9. 10
이 책은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요청에서 시작되었다. 젠더법학 수업을 들은 많은 학생들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말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을 내게 전해 주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느끼는 고통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학생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이제라도 말할 수 있게 되어, 언어로 풀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들의 진솔한 마음은 책 출간을 주저했던 내게 큰 용기가 되었다.
젠더와 법 모두 복잡하고 어려운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어, 이 둘이 만나는 젠더법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젠더법학은 전통적인 법학의 개념과 법리를 이해한 후에 배워야 할 학문인 만큼, 다루어야 할 범위가 무척 넓고 깊다. 헌법의 기본권, 형법의 범죄와 형벌, 민법의 계약과 가족뿐 아니라, 노동법, 사회보장법, 자본시장법, 인공지능법까지 어떠한 법도 젠더 관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페미니즘, 퀴어, 젠더학의 이론과 실천적 논의까지 함께 살펴야 하므로, 젠더법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당하는 수업의 수강생들은 법과 젠더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보다 깊이 있게 수업 내용을 이해했다. 학생들이 이토록 강의에 호응할 수 있었던 것은 법과 젠더의 문제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업을 거듭할수록, 젠더법학 수업의 초점은 이론의 정교함이나 논증의 엄밀함보다, 젠더법학의 관점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지로 바뀌었다. 이 과정은 젠더법학이 주는 사유의 힘이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법과 사회에 자리한 권력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페미니즘 법학의 사유가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페미니즘의 핵심은 ‘권력비판’에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의 권력을 비판하며 등장하였고, 페미니즘 법학은 남성을 법적 주체로 설정한 법체계와 가부장적인 국가 권력을 비판하며 등장하였다. 우리는 주류의 사고와 권위주의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주류의 사고는 대체로 남성중심적이며, 젠더 고정관념에 기반하거나, 권력 지향적이며 위계적일 때가 많다. 만일 우리가 부당한 권위나 권력에 짓눌려 사유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평생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편협한 삶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위계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만 사고한다면, 끝없는 욕망과 성취에 집착하며 피폐하게 살아갈 것이다.
페미니즘은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지평을 넓혀주는 학문이다. 이에 기초하여 발전한 젠더법학은 국가권력과 법의 정당성, 법적 권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과 확장은 익숙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삶과 사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젠더법학의 권력비판은 기존의 권력과 주류 질서뿐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의 또 다른 억압과 위계에 대해서도 이루어진다. 젠더법학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자들의 목소리에 특별히 귀를 기울이며, 그들과 연대하여 성평등한 세상을 위한 법제도적 방안을 모색한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책은 하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미처 담지 못한 젠더법학의 주제들이 있고,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문제들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법이론과 실무에 헌신하신 분들의 수고와 노력 덕분이다.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온 연구와 활동, 입법운동과 소송운동을 통해 형성된 실천적 담론, 젠더 관점의 법리를 발전시킨 판결, 그리고 이러한 판결이 나오기까지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준 법실무가들의 노력에 많은 빚을 졌다. 지금도 보이지 않게 묵묵히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계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한국의 젠더법학은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며, 이를 위한 노력은 좌절 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입법과 사법의 여정은 여전히 길게 남아 있다. 이 책이 그 긴 여정을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되기를 소망한다.
저자 약력
김주현(金珠賢)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젠더법학연구소 연구교수
이화여자대학교 학부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젠더법학과 인권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등 이론 연구에 기초하여 젠더법, 인권법, 법철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돌봄, 사법 백래시, 데이터 페미니즘, 인공지능법으로 연구 주제와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현대 평등주의 이론의 발전>, <디지털 시대의 평등권>, <헌법 제11조 평등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돌봄의 권력화와 젠더 불평등>, <사법 백래시>, <인공지능 판사의 성인지 감수성> 등이 있으며, 한국젠더법학회를 비롯해 인권법학회, 한국법사회학회, 한국법철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제1부 법과 젠더의 만남
01 법과 젠더
1. 젠더란 무엇인가 4
2. 법이란 무엇인가 8
3. 법의 역사 속 여성 10
02 젠더법학이란 무엇인가
1. 여성주의 운동과 법 16
2. 페미니즘 법학의 등장과 발전 24
3. 젠더 법학의 확장과 현재 33
판결에서 발견한 개념: 교차성 36
제2부 젠더와 법의 대화
03 헌법상 평등권과 성차별: 평등은 차별금지를 의미할까
1. 평등권과 차별금지 44
2. 성차별을 인정한 역사적 판결 58
3. 성평등을 위한 국제인권규범 65
4. 평등권과 적극적 평등실현조치 70
여성혐오, 증오범죄, 페미사이드: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84
04 성적 괴롭힘에 대한 법적 대응: 성적 괴롭힘은 왜 차별인가
1. 성적 괴롭힘의 역사와 법적 대응 90
2. 성적 괴롭힘의 법적 정의 93
3. 성적 괴롭힘을 인정한 역사적 판결 96
4. 성적 괴롭힘에 대한 법적 책임과 예방 101
05 강간죄의 역사와 성립요건: 성인지 감수성은 왜 판결에 등장했을까
1. 강간죄의 역사 112
2. 강간죄의 성립요건과 그에 대한 비판 122
3. 성인지 감수성 판결의 등장과 의미 131
4. 성폭력 피해와 2차 피해 대응 법제 140
강제추행죄의 법리 변화: 최협의 폭행․협박설 폐기 148
06 디지털 성범죄의 우선적 과제: 디지털 성범죄,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1. 디지털 성범죄의 현황과 문제 154
2. 디지털 성범죄 요건에 대한 비판: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 불법촬영죄 158
3.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 제도 169
4. 기술 발전과 딥페이크 성착취물 등장 172
07 성매매와 성매매처벌법: 성매매법은 누구를 처벌하는가
1. 성매매와 젠더 불평등 180
2. 성매매를 둘러싼 페미니즘의 논의 181
3. 성매매법의 역사 186
4.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례 198
08 낙태죄와 재생산 정의: 임신중지는 사회정의의 문제가 될 수 있을까
1. 낙태죄의 역사 206
2.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쟁 212
3. 낙태죄 헌법재판소 결정례 215
4. 재생산 ‘권리’에서 재생산 ‘정의’로 221
미연방대법원 임신중지 판결 225
09 가족, 가족법과 젠더: 법이 전제한 가족에 대한 도전
1. 한국 가족법의 젠더편향 234
2. 호주제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 251
3. 미국의 혼인평등 판결의 흐름 257
4. 가족을 구성할 권리 265
가정폭력법의 구조: 사적 문제에서 공적 책임으로 269
10 젠더화된 노동과 돌봄: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1. 역사 속의 여성과 일 274
2. 임금차별을 인정한 판결 276
3. 돌봄의 공적 책임 281
4. 돌봄을 보장하는 법과 판결 285
제3부 젠더와 법의 확장
11 젠더 포용과 다양성: 법과 다양한 성 정체성의 공존
1. 젠더 포용 300
2. 성소수자의 권리 보장 306
3. 성별정정에 관한 판결 311
12 인공지능법과 젠더: 성평등한 인공지능의 가능성과 미래
1. 인공지능기본법의 기본원칙 320
2. 고영향 인공지능 규제 324
3. 성평등 인공지능 거버넌스 330
인공지능 판사는 공정할까?: 인공지능 판사의 젠더편향 335
사항색인 347
판례색인 351
법률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