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6. 10. 20
1990년 11월, 독일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킬대학 재정학 강의실에서 나는 교수님과 논쟁 중이었다. 동서독이 통일된 지 한 달 정도 지난 뒤여서, 재정 부족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돈이 들어갈 곳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동독 지역 경제개발 자금이고, 다른 하나는 구동독 주민들의 생활보장 자금이었다. 통일이 되었으니 구동독 지역 주민들에게도 서독 지역 주민들과 동일한 사회보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그날의 토론 주제였다. 서독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사회보장 자금을 하나씩 열거하며 항목별 재정 지출을 점검하던 중이었다. 서독 지역 생활보호 대상 가정에는 아이들을 위해 일 년에 두 차례씩 의복비가 제공되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선물비를 준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헤어(Herr) 윤, 왜 웃지?” “교수님, 크리스마스 선물비까지 사회보장비로 주면 누가 일합니까? 이렇게 하니까 독일이 미국보다 성장률이 뒤떨어지는 것 아닌가요?” 내 질문에 교수님이 발끈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이랬다. “미국은 경제성장률이 높아져도 그 부는 일부에게만 간다. 그러나 독일의 경제성장은 국민 전체의 삶을 개선한다. 높은 성장률이 최고의 정책목표는 아니다. 우리는 미국과 철학이 다르다. 생활보호 대상 가정에 크리스마스 선물비를 주는 이유는, 독일의 가장 큰 명절에 부모와 아이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사회가 함께 지켜주기 위해서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그날 교수님의 말씀은 오래 남았다.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의 삶을 바꾸는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물음은 다름 아닌 내 나라의 물음이 되었다.
지표만 보면 우리는 성공한 나라다. 반세기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섰고, 세계는 그 속도를 기적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성공한 나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하루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내 집 마련은 멀어지고, 노후는 불안하고, 청년은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 나라는 부유해졌는데 내 삶은 왜 이렇게 늘 빠듯한가. 이 책은 바로 그 간극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익숙하다. 너무 익숙해서, 어느새 풀 수 없는 문제로 체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집값, 사교육, 노인 빈곤, 비정규직, 지방소멸- 이름만 대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문제들이 수십년째 반복된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새로운 대책이 나오지만, 몇 해가 지나면 문제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가 진단과 처방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대부분 구조의 문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제도와 관행이 쌓이며 만들어진, 깊고 단단한 구조의 결과다. 그런데 우리의 처방은 짧고, 대증적이고, 단편적이다. 5년이라는 임기 안에 성과를 내야 하는 정치는 구조를 건드리는 대신 증상을 누른다. 그렇게 같은 처방이 반복되고, 같은 실패가 반복된다. 게다가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성장률은 내려앉고 인구는 줄어드는데, 정작 구조를 바꿀 용기를 내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구조의 문제는 구조를 보는 눈으로만 풀린다. 그리고 나는 그런 눈을 독일 경제학의 오래된 전통에서 발견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 구스타프 슈몰러, 발터 오이켄- 이들은 시장을 추상적인 수요 · 공급 곡선이 아니라, 역사와 제도 속에서 작동하는 살아 있는 질서로 보았다. 독일 역시 후발 산업국으로서 우리와 닮은 고민을 했고, 시장을 방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치열하게 논쟁했다. 그리고 그 나라를 현실에 구현하려면 어떤 질서를 세워야 하는가를 끈질기게 물었다. 이 책이 독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의 제도를 그대로 옮겨 오자는 뜻이 아니다. 독일이 자기 문제에 던졌던 질문을, 우리 문제 위에서 다시 던져 보자는 것이다.
독일 경제학이 이런 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에서 경제학은 정치학 · 법학과 함께 ‘국가학(Staatswissenschaft)’, 곧 국가를 경영하기 위한 학문으로 불린다. 경제학이 국민의 삶을 위한 학문이라면, 정치학은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학문이고, 법학은 그 합의를 제도로 굳히는 학문이다. 실제로 한때는 하나의 법학연구소 아래 경제학부와 정치학부가 함께 자리하기도 했다. 한 사회가 지향하는 나라를 만들려면 이 세 학문이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하고, 그러자면 공동의 지향점-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합의-이 있어야 한다. 경제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정치와 법률의 영역에서도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바로 그 공동의 지향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내가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썼다. 나는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10년 넘게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독일의 국민경제학 (Volkswirtschaftslehre)은 교과서 몇 권으로 정리되는 학문이 아니라, 그 사회의 역사와 사고방식 안에서 자라난 학문이다. 그 안에 오래 머물러 본 사람만이 전 할 수 있는 결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독일을 칭송하려는 것도 아니고 독일이 모든 것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와 경제를 둘러싼 기술이나 국제관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경제정책과 제도도 그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같은 철학과 목표하에 이루어져야 동일한 방향성을 가지고 성과가 축적될 수 있다. 독일 경제학은 이 전통을 만들었다. 이 전통을 한국의 문제에 연결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진단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성장, 노동시장의 분절, 부동산에 묶인 자산, 갈수록 벌어지는 격차- 우리 경제의 통증을 하나씩 짚은 뒤, 그 통증을 만들어 낸 구조를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로 나아간다. 나는 이 문제들이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인이 있다면 해법도 있다. 다만 그 해법은 더 깊은 곳에서, 더 긴 시간을 두고 보아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 책으로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우리가 끝내 풀지 못해 좌절해 온 문제들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디서부터 풀어 갈 수 있는지를 차분히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끝에 작은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그래서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조금 더 나은 나라를 건넬 수 있다면, 이 책은 제 몫을 다 한 것이다.
이 책이 있기까지 도와준 분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을 구상하던 단계에서부터 경기도일자리재단 동료들의 자문과 논평이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임수철 단장, 허정은 본부장, 임은실 팀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출판을 맡아준 박영사에도 감사한다. 장규식 부문장님의 세심한 협력과 한도결 선생님 의 꼼꼼한 편집작업에 큰 인사를 드린다. 물론 책의 미진한 부분은 모두 저자의 부족의 소치다.
저자 윤덕룡은 독일 킬(Kiel)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킬대학 이론경제연구소와 Kiel Institute for the World Economy에서 연구조교로 일하며 독일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역사학파에서 질서자유주의로 이어지는 독일 경제학이 강의실이 아니라 정책과 제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았고, 분단국이 통일국가로 넘어가는 과정도 같은 시기에 곁에서 지켜보았다.
귀국 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20년 넘게 정책연구를 했고, 정년 후에는 KDI에서 G20 관련 정책개발을 담당했다.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기재부장관 대외자문관, G20 Working Group(IFA) 한국대표로 정책이 결정되는 자리에도 참여했다. 좋은 답을 아는 것과 그 답이 제도가 되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오래 배웠다.
지금은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로 '사람들의 꿈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CHAPTER 01 성장한 경제, 나아지지 않는 삶 13
1 숫자와 삶 사이 — 한국인의 불안 13
2 이것은 개인의 문제인가 — 구조적 패턴으로서의 불안 14
3 해결을 시도했는데 왜 안 됐는가 16
4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 19
5 이 책의 접근 방식 21
이 장의 자료 출처 23
CHAPTER 02 시장경제의 작동 방식과 그 범위 24
1 시장이 풀지 못한 한국의 세 문제 24
2 가격이 하는 일 26
3 시장이 다루기 어려운 영역들 26
4 세 가지 경제학적 접근의 차이 28
5 ‘시장이냐 국가냐’를 넘어 30
이 장의 자료 출처 31
CHAPTER 03 독일 경제학 — 국민경제학이라는 관점 32
1 국민경제학은 왜 탄생했는가: 후발 산업국의 고민 32
2 두 가지 경제학: 무엇이 다른가 37
3 프리드리히 리스트: 생산력과 발전 단계 37
4 구스타프 폰 슈몰러: 역사학파와 제도의 경제학 39
5 질서자유주의: 경쟁 질서의 설계 43
6 국민경제학의 세 가지 핵심 기둥 46
7 시장·국가·사회의 삼각 구도 48
8 VWL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세 가지 정책 사례 49
9 이 책의 분석 기준: 효율성·형평성·지속가능성 50
10 이 장의 결론: 경제는 선택이다 51
이 장의 자료 출처 52
CHAPTER 04 발전국가의 성취 — 리스트 원리가 작동한 방식 53
1 세계 경제사에서 전례가 없는 성취 53
2 리스트의 원리, 한국에 적용되다 56
3 자본 조달: 가능한 모든 경로를 끌어모으다 57
4 인력 양성: 사람이 곧 생산력이다 60
5 전략 실행: 목표와 점검의 시스템 62
6 새마을운동과 자발성의 인센티브 설계 65
7 리스트의 언어로 정리하면 67
8 그러나 성공은 다음 단계의 짐이 되었다 68
9 리뷰 시스템이 약해진 자리 71
이 장의 자료 출처 74
CHAPTER 05 외환위기 — 전환점에서 굳어진 제도 75
1 환경이 바뀌면서 드러난 것들 76
2 도미노가 쓰러지다: 1997년 80
3 두 가지 선택: 국가 부도냐 IMF냐 81
4 위기의 체감: 국민들이 겪은 것 82
5 IMF 처방: 누구를 위한 수술인가 83
6 위기가 만든 새로운 잠금: 이후 세대가 짊어진 것 85
7 이 장이 남기는 질문 88
이 장의 자료 출처 90
CHAPTER 06 추격 성장의 끝 — 성장 동력 전환의 과제 91
1 30년의 하락 추세: 데이터가 말하는 것 91
2 왜 하락하는가: 두 가지 설명 93
3 인구 구조: 확정된 미래의 압박 95
4 사회적 준비의 부재: 선진국과 다른 조건 97
5 리스트의 진단: 단계 전환에 실패했다 99
6 이 장이 제시하는 질문 101
이 장의 자료 출처 102
CHAPTER 07 노동시장 — 왜 일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가 103
1 이중구조를 넘어 — 다섯 층위의 현실 103
2 인적 자본의 새로운 도전들 107
3 이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10
4 슈몰러의 진단 — 분배는 생산 구조의 결과다 111
5 정책 대응의 한계 — 선한 의도가 충분하지 않은 이유 112
6 VWL의 접근과 독일의 경험 115
7 한국-독일 비교 — 왜 독일은 다른가 120
8 분배 경로가 막히면 — 한 문제가 모든 문제와 만난다 121
이 장의 자료 출처 125
CHAPTER 08 왜 자본은 부동산으로 향하는가
— 합리적 함정과 경쟁 질서의 설계 126
1 데이터가 보여주는 것: 부동산 쏠림의 실태 126
2 부동산 가격 상승이 야기하는 경제·사회적 문제 128
3 왜 부동산 투자는 개인에게 합리적인가 130
4 정부의 딜레마: 왜 이 구조를 깨기 어려운가 133
5 오이켄의 렌즈: 경쟁 질서의 네 가지 왜곡 135
6 수요 억제냐 공급 확대냐: 잘못 놓인 이분법 136
7 VWL이 제시하는 방향: 철학에서 시작하는 다층적 설계 140
8 이 장이 다음 장에 던지는 연결 145
이 장의 자료 출처 147
CHAPTER 09 성장의 과실은 누구에게
— 분배의 단절과 세대 간 격차 148
1 데이터: 세대 간 자산 격차의 실태 148
2 재분배 제도의 실패: 격차가 교정되지 않는다 150
3 슈몰러의 진단: 왜 격차가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가 151
4 분배 철학의 부재: 왜 이 구조가 방치되어 왔는가 153
5 노인 빈곤: 불평등의 다른 극 157
6 사회적 동력의 약화: 불평등이 만드는 집합적 결과 157
7 VWL이 제시하는 방향: 분배 경로의 재설계 159
8 이 장이 던지는 연결 160
이 장의 자료 출처 162
CHAPTER 10 성장 동력의 재설계 — 리스트의 처방 163
1 한국의 R&D 역설: 투입은 세계 2위, 혁신 성과는 OECD 하위 163
2 리스트의 처방: 단계가 바뀌면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164
3 왜 선도가 어려운가: 혁신을 막는 구조적 장벽 165
4 전환의 세 과제: 인재·자본·제도 169
5 국제 비교: 선도 단계의 다양한 모델 173
6 한국형 선도 단계 전략의 방향 175
7 리스트의 처방과 슈몰러·오이켄의 연결 177
8 이 장이 다음 장에 던지는 연결 177
이 장의 자료 출처 178
CHAPTER 11 경쟁 질서의 확립 — 오이켄의 처방 179
1 왜 경쟁인가: 소비자 주권과 시장 효율 180
2 경쟁은 기업에게도 이득이다 — 그러나 개별 기업은 피하려 한다 182
3 경쟁 질서의 설계: 오이켄의 이론 틀 184
4 독일의 경쟁 질서 관리: 제도적 인프라 185
5 한국의 현실: 경쟁이 제한되는 구조 187
6 경제력 집중이라는 근본 문제 — 오이켄이 가장 경계한 것 190
7 한국형 경쟁 질서 구축 방향 191
8 경쟁 질서 확립이 만드는 선순환 193
이 장의 자료 출처 195
CHAPTER 12 분배 기제의 재구성 — 슈몰러의 처방 196
1 분배의 목적: 네 가지 철학적 원칙 196
2 분배 개선의 경제적 의미: 통념을 넘어서 199
3 네 원칙의 통합적 조망: 독일과 한국의 비교 203
4 독일의 제도적 구현: 어떻게 철학이 제도가 되는가 204
5 한국의 현실: 네 원칙의 실패 207
6 한국형 분배 기제 재구성: 네 원칙의 제도화 209
7 세 처방의 통합: 왜 함께 작동해야 하는가 211
이 장의 자료 출처 213
CHAPTER 13 기회의 설계 — 교육과 지역균형 214
1 교육의 두 가지 실패 214
2 계층 사다리에서 계층 대물림으로: 슈몰러의 시각 217
3 독일의 답 (1): 무상교육과 이중 경로 219
4 독일의 답 (2): 통로성 — 경쟁을 생애 전체로 되돌리는 장치 221
5 지역에서 사람을 키운다: 교육의 공간 구조 224
6 수도권 집중과 지방 공동화: 공간적 불평등 227
7 사라진 성장축 228
8 독일의 지역균형: 원칙, 기준, 재정, 그리고 축 232
9 한국에 필요한 것: 다섯 개의 설계도 241
이 장의 자료 출처 247
CHAPTER 14 철학과 설계도: 한국 경제의 다음 과제 249
1 철학과 설계도의 부재: 한국 문제의 뿌리 249
2 독일의 경험: 철학 → 설계도 → 지속적 개선 251
3 한국과 독일의 근본적 차이 253
4 VWL이 한국에 제시하는 것: 시스템적 접근 254
5 한국이 먼저 해야 할 것 255
6 한국은 이미 해봤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257
7 이 책이 제시하는 것 260
이 장의 자료 출처 262
주요 참고문헌 / 263
부록 /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