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10.20
머리말
위대한 석학을 접하면서 경외심을 갖는 것은 나의 천학비재淺學菲才 탓도 있지만, 그들의 사상과 이론 세계가 놀라울 만큼 정합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위인들의 대작을 많이 섭렵해서가 아니라 그중 몇 권 되지 않는 저작을 면밀하게 읽고 번역한 데 있다. 자연과학 지식이라고는 50년 전 대입 ‘예비고사’를 준비한다고 배운 물리, 화학, 생물, 지학이 전부인 나는 무모하리만치 과욕을 부리면서 위대한 과학자로 명성 높은 마이클 폴라니의 Tacit Dimension과 데이비드 봄의 On Creativity를 번역하여 각각 <암묵적 영역>과 <봄의 창의성>이라는 제하로 출간한 바 있다. 번역 과정에서 두 석학의 위대함에 숙연해졌다. 하지만 만남의 계기는 가히 숙명적이었다. 현직 시절에는 자주 대형 서점에 들러서 이것저것 책을 들춰 보고 마구 구입한 적이 많았다. 그중 즉석에서 구매하여 그날 저녁 두세 장을 대충 읽고는 바로 다음 날 출판사에 연락하여 생떼를 부려 번역하여 출간한 책이 바로 이 두 권이다.
한때 인연을 맺었던 영국이 두 석학의 활동무대였음을 알게 된 것은 귀국하여 이른바 ‘자리’를 잡은 다음 일이었다. 공부를 게을리한 나에게 새로운 경계를 열어 준 석학을 알게 된 행운이 뒤늦게 찾아온 셈이다. 이와 같은 기회가 또 주어진다면 나는 천은天恩으로 알고 기꺼이 다시 도전할 것이다.
의욕에는 늘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우리나라 출판계는 웬만한 학술서적을 번역해 내지 않는다. 출판사 입장에서 비싼 저작권료도 있지만 독자들의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생떼’에 반대급부로 출판사는 번역서에 합당한 ‘해설서’ 집필을 제안하였다. 시장성도 있고 일반인에게 번역한 대작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안내서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해설서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도 모르거니와 뜻하는 바도 아닌 듯하여 ‘마음속으로’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암묵적 영역>을 이런저런 식으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준비한 노트를 모아 출판사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 책의 제2장은 내가 번역한 <암묵적 영역>을 중심으로 20세기 위대한 석학 마이클 폴라니를 소개하고자 한 노트를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여기저기 널린 노트에 폴라니의 다른 저서를 탐독하면서 해설서가 아닌 다른 형태로 책을 내기로 하였다.
이것이 <폴라니의 암묵적 영역: 의미와 적용>의 탄생 동기다. 하지만 어떻게 보아도 이 책은 나의 번역서 <암묵적 영역>의 해설서가 아니다. 폴라니의 암묵지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으므로 해설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폴라니의 암묵지가 우리 삶과 세계에 차지하는 비중과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정합성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폴라니의 암묵지는 인식론과 심리학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지만 철학사, 과학철학, 형이상학, 역사학, 진화론, 사회학, 정치철학, 교육학 등에 두루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폴라니의 암묵지 이론 체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합적으로 들어맞는다. 암묵적 기제의 작동은 인류가 발전시켜 온 사고 체계, 과학적 탐구의 성격, 물질과 생명의 발생, 경계조건과 진화, 자유와 권위, 민주주의의 함정, 발견학습의 장단점 등을 모두 설명한다. 집필 과정에서 나의 이러한 확신은 강화되었다.
사적인 변명 말고 내게는 책을 내게 된 또 다른 사연이 있다. 폴라니는 우리나라에서 그의 학문적 위상과 비중에 걸맞지 않게 미흡하거나 어긋난 방향에서 소개되었다. 어떤 개념은 핵심 개념인데도 뜻이 전달되지 않을 만큼 어색하게 번역되었다. 학술지에 게재된 상당수 논문에서 언급된 폴라니는 엉뚱한 맥락에서 다뤄지기도 하였다. 또 그의 학문적 위상이 오도되기도 하였다. 비언어적 지식을 강조한 점에서 옥스퍼드의 라일 교수가 주장하는 ‘방법적 지식’이 폴라니의 암묵지와 유사해 보인다고 해서 동일시해선 안 된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실상은 정반대다. 암묵지가 우리 인식을 고양하는 과정을 포퍼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측과 반박’으로 보는 것도 그릇된 이해다. 무엇보다도 폴라니가 인정했듯이 암묵지가 게슈탈트 심리학에 의존하였지만,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폴라니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여러 방면에서 폴라니의 아이디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전공 분야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소개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이 폴라니를 제대로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당초에 얇은 분량의 책을 낼 생각이었으나 집필 과정에서 양이 기대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많아 보이는 양 속에서 다루지 못한 분야와 더 심층적으로 다루지 못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나의 협량狹量으로 더 이상의 만용을 부리지 않기로 하였다. 다소 많은 분량에 독자들이 지루할지 우려된다. 폴라니 주장의 대강을 먼저 알고 싶은 독자는 프롤로그, 제1장, 제2장 그리고 제15장을 먼저 읽고 나서 마음에 끌리는 장을 선택해 읽어도 좋을 듯하다. 각 장이 독립적일 만큼 중요한 내용이 중복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구성에 체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각 장은 주제별로 나누었지만, 폴라니의 ‘암묵지’를 매개로 하여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각 장에 수록된 미주가 연결점을 마련해 주고, 뒤에 붙은 색인은 책 전체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폴라니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거나 석박사 논문을 준비하고자 하는 독자는 전체를 면밀하게 읽기를 바란다. 약간의 인내심을 갖고 읽다 보면 폴라니에 대한 오해를 털어내고 남다르게 전개하는 그의 창의적이고 정합적인 아이디어를 만나게 될 것으로 믿는다.
독자들에게 이 책을 <암묵적 영역>의 개정 번역판과 함께 읽기를 권한다. <암묵적 영역>은 폴라니의 생전 가장 나중에 나온 저술로 분량도 많지 않고 그의 사상이 잘 집대성된 책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인용된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일차적으로 <암묵적 영역> 개정 번역판에 의존하였다. 또 10년 전 세상에 나온 초판에 비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역자가 나름대로 ‘개정’ 노력을 기울였다. <암묵적 영역> 개정 번역판과 더불어 책을 읽는 기쁨이 증폭될 것이다.
책을 내어 기쁘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좋겠다. 나는 잘못 알려진 폴라니가 온전하게 이해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독자에게 진정한 이익이 된다고 믿는다. 책을 펴낸 박영사에 감사드린다. 특히 기획을 맡은 박세기 부장님과 까다로운 편집을 깔끔하게 수행해 준 이혜미 과장님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영혼의 속살마저 태운 을사년 여름을 보내며
현산 김정래 삼가
김정래(金正來)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University of Keele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하여 철학박사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강원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 국민대학교, 중앙대학교, 홍익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국교육개발원 부연구위원과 부산교육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한때 제15대 한국교육철학회장, <한국교육신문> 논설위원, <미래한국> 편집위원, 하이에크 아카데미 원장, 한국청소년개발원 객원연구위원을 역임한 바 있고, 주요 언론에 시사 칼럼을 쓰고 여러 학회에서 활동하였다. 정치철학과 가치문제를 중심으로 공부하다가, 마이클 폴라니와 데이비드 봄의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문명과 진화 그리고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문인(文人)이다.
저서로는 본서인 <폴라니의 암묵적 영역: 의미와 적용>(2025)을 비롯하여, 아동권리향연 시리즈인 <아동권리향연 마당>(2022), <아동권리향연 플러스>(2022), <증보 아동권리향연>(2020)이 있으며, 문명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나>(2022)와 <세상을 바꾸는 힘>(2022, 공저)을 낸 바 있다. 그 이전에 <문맹기초연구>(2018), <민주시민교육비판>(2013), <진보의 굴레를 넘어서>(2012), <고혹 평준화해부>(2009), <공교육과 자유주의 교육정책>(2009), <전교조비평>(2008), <서양교육사 절요>(2004), <권리이론과 교육권>(1998)을 썼다.
역서로는 <암묵적 영역(마이클 폴라니)>(개정 2025; 2015), <봄의 창의성(데이비드 봄)>(2021), <권위, 책임, 교육(리처드 피터스)>(2021), <지식의 조건(이스라엘 쉐플러)>(2017), <플라우든 비평(리처드 피터스 편)>(2021, 공역), <초등교육문제론(로버트 디어든)>(2015), <아동의 자유와 민주주의(로즈마리 챔벌린)>(2015), <교육과 개인(브렌다 코헨)>(2014), <교육목적론(콜린 린지)>(2013), <대중을 위한 경제학(진 캘러핸)>(2013, 공역)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i
프롤로그 1
제1부 도 입
제1장 마이클 폴라니의 출현 17
제2장 <암묵적 영역>을 열며 39
제2부 의 미
제3장 언어를 넘어서는 지식 81
제4장 방법적 지식을 넘어서 113
제5장 주관적이어야 할 지식 141
제6장 일-중심사고방식으로 169
제3부 적 용
제7장 지식의 실천성 213
제8장 암묵지의 현장 실행 243
제9장 경계조건과 진화 269
제10장 권위와 자유의 상보성 305
제11장 발견학습의 실상 329
제12장 탐구 논리로서 자유 351
제13장 교육적 전달 가능성 377
제14장 전체주의 민주정 399
제4부 마 감
제15장 암묵지의 표출과 위상 449
에필로그 477
참고문헌 489
색인(사항/인명) 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