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05.15
들어가는 글
“아기의 얼굴에 수건을 덮고는 아기의 머리를 욕조 물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죽여서 미안해요’라고 반복해서 되뇌었습니다. 아기의 머리를 욕조에 집어넣고 조금 지나자 더는 움직이지 않았기에 ‘죽었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욕조에서 끄집어냈습니다. 욕조에서 꺼낸 아기는 울지 않았고, 태어날 때 그렇게 움직였던 다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에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에서 발생한 부모에 의한 아동살해 사건 이야기이다. 생명은 존엄하다. 새 생명의 탄생은 그 누구나 축복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생명이 있다는 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아동살해나 학대 사건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생활고에 시달린 끝에 초등학생 두 자녀를 살해한 40대 어머니, 온몸에 멍이 든 채 숨진 아이, 냉장고에서 발견된 아기의 시신, 쓰레기로 가득한 고시원 방에서 홀로 곰팡이 핀 음료와 상한 음식을 먹고 있었던 8살 아이…. 우리 사회의 아동학대도 끝없다.
아동학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 사회는 분노한다. 너도나도 절대 가볍지 않은 비난과 강력한 처벌의 목소리를 쏟아낸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자녀를 소유물로 보는 게 문제입니다”라고 분석하면서 학대자의 일그러진 자아를 질타한다. 미디어는 하나 같이 대중의 분노의 대변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사건을 연일 되새김질한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이 모든 게 거북스럽다. 마치 사회 정의 구현의 사도가 된 것처럼 아동 학대자에 대해 분노하고 강력한 처벌을 외치는 자를 볼 때면 그들이 언제부터 아동 인권 지킴이의 선봉장이 되고 싶었는지 질문하고 싶어진다.
마치 독심술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학대자의 마음을 진단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분석을 들어보면 본인 취향의 정보로 무장한 관념적인 교양인의 정형화된 진단 그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각종 미디어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유혹하기 위한 영상이나 자극적인 표현을 찾느라 노력하는 몸부림이 애처롭고, 마치 아동 학대자를 본질에서 우리와는 다른 인간임을 확신시켜 부담 없이 학대자를 비난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물론 아동학대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행위의 책임은 절대 가볍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다만 필자는 아동 학대자에 대한 비난이나 처벌의 목소리가 거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라는 당연한 의문 없이 낭만적 도덕론에 심취해 관념적 정론을 펼치는 자들의 목소리가 자신의 분노 해소 이상의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남의 집 닭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당시 법으로 정해야 할 정도로 남의 집 닭을 훔치는 사람이 많았던 거 같다. 그런데 만일 닭을 훔쳐서 안 된다는 법을 만들어 엄하게 처벌하여도 여전히 닭을 훔치는 사람이 많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동학대 문제를 풀고자 할 때도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아무리 강력하게 처벌하여도, 아무리 예방 교육이나 감시 체제를 강화할지라도 아동학대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아동학대 예방에는 교육이나 강력한 처벌, 감시 시스템은 거의 무의미하다. 만일 교육이나 감시, 강력한 처벌 등의 대응책으로 아동학대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아동학대 제로에 가까운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아동학대의 세계에는 두 가지의 불편한 공식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해자의 80% 이상이 부모라는 사실이다. 이 공식은 아동학대 예방의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부동의 사실이기도 하다.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이지만, 일부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현실은 그렇다.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은 아동학대는 모성애가 결핍된 부모나 사명감이 부족한 교사가 저지르게 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모습은 감당하기 힘든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인간의 인격이 굴복당한 안타까움이다.
인간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아이를 키워나가지만, 일상적 삶이 무너지고 살아가는 게 불가능해지면 양육자의 마음에 성모 마리아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녀 양육’이란 어디까지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을 때 가능한 행동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런 울타리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은 가족 가운데 가장 힘없는 자의 희생을 기대한다.
이런 사람에게 도덕적 규범이나 학대를 규정하고 있는 아동복지법, 또는 발달심리학의 애착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현대 문화는 어머니의 마음에 성모 마리아상의 그림을 그려놓지만, 감당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의 인간성은 그 그림을 가차 없이 지워버린다.
인간 마음의 메커니즘은 천사를 지향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적응의 원리에 의해 승리자를 지향하는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눈앞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도덕성이나 성실성을 유연하게 바꾸어 나가는 계산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노스이스턴 대학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드스테노 박사1)는 자신의 일련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도덕성은 신의 선물이 아니며, 상황에 따라 한없이 무너지는 허약함 그 자체이다”라고 결론 내리면서 인간의 인간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자(聖者)라고 불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인이 될 수 있으며, 죄인이라도 상황만 허락한다면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누구라도 아동 학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아동 학대자가 되는 것은 절대 이상하지 않다. 2020년 초에 발생한 세계적인 대유행 병, ‘코로나19’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때 세계 각국은 코로나 감염의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당시 코로나 전염과 함께 폭발적인 증가 현상을 보인 사회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동학대의 발생률이었다. 코로나 이전보다 무려 80~90%나 증가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온종일 집 안에 갇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부모들의 육아 피로도는 모성애를 넘어서 버렸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으며,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성실성이나 도덕성이 유연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아동학대를 분노하는 자들의 마음에도 언제든지 아동학대의 몽우리가 싹틀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논리를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아동학대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본서의 집필 동기는 크게 다음 2가지이다. 하나는 ‘아동학대’가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왜’라는 의문 없이 성급한 분노와 강력한 처벌의 목소리로만 가득 차 버리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학대자의 마음에도 당신과 다름없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살고 있지만, 우리가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면 ‘아동권리와 인권 존중’이라고 하는 값싼 슬로건으로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처벌이라고 하는 경고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감시라고 하는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지성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학대가 발생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또 하나는 ‘실체가 없는 아동학대 탄생’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무감각이다. 오늘날 보육과 교육의 세계에 낭만적이고 관념론적 아동 인권론과 복지론이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동학대 판단의 칼날은 마치 ‘free size shoes(크기가 자유로운 신발)’가 되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광대의 춤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보육이나 교육의 세계는 훈육과 학대의 경계선이 사라지고, 인간의 실수나 부적절한 대응 등의 시행착오도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은 분명히 비지성이다. 그 결과물은 ‘아이들의 살아가는 힘’의 침묵이다.
아이들은 성장하여 언젠가는 부모 곁을 떠나 험난한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살아가는 힘의 발휘다. 살아가는 힘에는 ‘생각하는 힘’, ‘견디는 힘’ 그리고 ‘타인과 함께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힘의 탄생은 행복한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장 과정에서 실패나 시련, 결핍의 경험도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낭만적 아동 인권론자들은 아이의 시련이나 결핍을 문제 삼고 있다. 일찍이 14세기 중세 이슬람 역사 사상가 이븐 할둔은 시련이나 결핍을 모르는 문명 속에 사는 인간은 의지와 인내심, 그리고 단결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어 결국 그 문명은 몰락하게 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양육론이나 교육 정론(正論)은 아이와는 너무 동떨어진 낭만적 아동행복론과 관념론적인 아동 인권론에 빠져있다. 이 때문에 ‘실체가 없는 아동학대’의 희생자가 생산되고, 아이들은 의지력과 인내력, 그리고 공동체 의식의 약화라고 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아동권리와 인권 존중이라는 명목 아래 아이들의 성장에서 이런 소중한 것을 빼앗아 버리는 어리석음은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의 다음 비유가 적절하다.
“그들은 빵을 찾고 있지만, 스스로 빵집을 파괴하고 있다.”
본서는 이런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 발달심리학, 사회심리학, 신경심리학(뇌과학), 범죄심리학, 법학, 정신의학, 행동경제학, 문화인류학,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 이야기를 도움받았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제1부에서는 아동학대의 오해(특히 가해자와 피해 아동에 대해서)에 대한 문제, 제2부에서는 실체가 없는 아동학대를 탄생시키는 문제, 제3부에서는 ‘free size shoes’가 되어버린 광범위한 아동학대 해석의 문제, 제4부에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양육과 교육의 문제를 다루었다. 제5부에서는 아동학대 예방 교육과 처벌의 무용론, 그리고 감시 시스템(CCTV)의 문제를 실었다. 끝으로 제6부에서는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학대가 발생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하늘의 천사가 미소 머금고 바라보는 환상을 그리고 있는 아이를 왜 선생님들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가?
하늘로 쏘아 올린 종이비행기가 허공에서 허둥대며 떨어지면 장난기 많은 요정의 마술이라고 착각하며 깔깔 웃어대는 어린아이를 왜 온몸으로 안아줄 수 없는가?
이 의문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모두 ‘학대의 오해’가 낳은 저주를 두려워해서이다. 이제 이 의문의 슬픔을 공유하기 위해 첫 장을 펴보자.
현정환
경남 밀양 출생. 동경가꾸게이대학대학원(임상심리학) 및 히로시마대학대학원(유아심리학)에서 심리학전공(심리학 박사).
주요 저서로는 『아동상담』, 『아이들의 자유』, 『영유아 발달』, 『엄마의 해방』, 『우리는 아이를 착각하고 있다』, 『상담심리학』, 『인간심리의 이해』, 『아이 사육 시대에 잃어버린 아이학 이야기』 등이 있다.
해외출판 저서(공저)로서는 『乳幼児発達検査尺度』, 『The role of the father in child development(Fourth Edition)』 , 『Handbook of Cultural Developmental Science』 , 『The Role of The Father in Child Development(Fifth Edition)』, 『Childhood and Adolescence: Cross-Cultural Perspectives and Applications』, 『Grandparents in Cultural Context』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jhhyun@stu.ac.kr) 중.
PART 1
아동학대에 대한 오해
CHATER 01 아동학대 개념의 탄생 / 20
CHATER 02 아동 학대자에 대한 오해 / 24
양육의 세계는 아이와의 공동 사업이다 _24
부모가 자녀를 차별한다? _27
아동학대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_28
부모와 자녀의 적합도 _32
CHATER 03 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오해 / 39
아이는 평생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_39
‘미성숙’이라는 축복 _43
아이들은 소박한 낙천주의자다! _47
CHATER 04 학대 아동에 대한 불길한 예언이 낳는 폭력성 / 53
정신의학은 병을 창조하는 학문이다? _53
‘학대 아동’이라는 선언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_56
희망과 기대 효과 _58
신체 건강에도 중요한 기대 효과(플라시보 효과) _59
그렇다면 왜 ‘기대와 희망’이 실제가 되어버리는 걸까? _63
학대 아동에 대한 불길한 예언은 2차적 가해이다! _66
PART 2
실체가 없는 아동학대의 탄생
CHATER 01 소박한 부모 편애주의자 / 72
당신의 기억 정보는 정확한가? _72
아이의 마음을 지배하는 권위효과 _74
아이는 정직하다?! _77
아이의 거짓말은 간파하기 어렵다 _82
아이가 몰랐던 타인의 아픔 _83
아이는 왜 엄마가 원하는 거짓말을 해버릴까? _87
CHATER 02 미디어가 생산한 아동학대의 탄생 / 90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 _90
미디어는 정확한 정보를 전하고 있는가? _93
미디어가 말하는 ‘다수’라는 실체는 그 시작점이 허구다 _94
미디어에 대한 2가지 궁금증 _97
학대 사건이 반복 보도됨으로써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 _99
아동학대 보도의 리터러시 _101
CHATER 03 인간의 편의주의적 사고가 낳은 아동학대의 탄생 / 105
자신이 믿고 있는 게 사실이다? _105
‘그렇지 않은 정보’를 소홀히 하는 인간의 허술한 사고 _110
일반화의 어리석은 작품 _114
PART 3
3가지 덫
CHATER 01 CCTV 영상물의 마술 / 120
만능의 약인가, 판도라 상자인가? _120
영상물의 마술을 두려워하는 자들! _122
CHATER 02 비단벌레식 아동학대 해석과 그 기준의 이중성 / 125
비단벌레식 아동학대 해석 _125
학대 판단에 대한 법과 임상 장면의 관점 _127
학대 판단 기준의 이중성 _130
PART 4
야만의 희생
CHATER 01 양육과 교육 불안의 희생양 / 134
마녀사냥은 왜 일어나는가? _134
그것은 양육과 교육 불안의 희생양과 같은 것이다 _137
CHATER 02 자유, 사랑, 용기의 몰락 / 140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 _140
자유, 사랑, 용기의 몰락 _142
CHATER 03 분노의 희생양 / 147
나쁜 짓을 하면 벌을 주는 이유 _147
책임의 조건 _148
아이의 행동결과는 통제할 수 없다! _151
아이의 마음을 지배하길 원하는가? _152
또 하나의 논리 _154
희생양 찾기 _155
PART 5
과연 도움이 되는 방법인가?
CHATER 01 아동학대 예방 교육은 학대 방지에 도움이 되는가? / 162
‘교육’이라는 환상 _162
왜 인간의 마음은 교육으로는 바뀌지 않는가? _164
학대 예방 교육의 무력함 _166
교육자의 자기만족 _168
CHATER 02 감시 시스템은 인간행동 통제의 효과적인 수단인가? / 170
행동경제학의 이야기 _170
보통 인간의 모습 _173
감시카메라는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 _178
CHATER 03 현장에 답이 있다! / 182
전문가들은 틀린다! _182
직접 만나보자 _185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라! _188
왜 자선 사업은 독이 되었는가? _193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은 필요 없다 _196
PART 6
아동학대의 출구를 찾아서
CHATER 01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 200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_200
시대가 위인을 만든다 _202
소문과 실제가 다르다? _204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 것 같다? _208
CHATER 02 학대가 발생하기 쉬운 상황 / 212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덕심을 상실하기 쉽다 _212
직무 피로도가 높은 사람은 위험하다 _214
욕구불만이 높으면 폭력적인 행위가 나타나기 쉽다 _216
피곤해져 버린 자제력 _218
누구라도 아동 학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_221
CHATER 03 학대 예방의 특효약은 ‘여유’이다! / 224
학대 예방 선진국에서 왜 학대가 많이 발생하는가? _224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현실 _236
CHATER 04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비법 / 239
절망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 _239
존엄이 현실이 되었을 때 _240
존엄 상실과 아동학대 _242
종결편
권태와 환멸의 시간
권태와 환멸의 시간 / 248
권태와 환멸의 시간 _248
중세 시대의 흥미로운 관습 _250
우리 사회는 아이의 존엄을 소유하고 있는가? _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