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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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무찌르기: 미국의 교육개혁과 그 적들
신간
골리앗 무찌르기: 미국의 교육개혁과 그 적들
저자
Diane Ravitch
역자
유성상
분야
교육학
출판사
박영스토리
발행일
2022.03.10
개정 출간예정일
페이지
424P
판형
신A5판
ISBN
979-11-6519-221-1
부가기호
93370
강의자료다운
-
정가
22,000원

중판발행 2022.05.02

초판발행 2022.03.10


우리는 모두 교육이란 이름의 배움에 임한다. 배움은 지식을 쌓아나가면서 세계를 보는 눈, 즉 관점을 심화, 확장하도록 해준다. 교육은 개인적임과 동시에 사회적이다. 어제의 내 배움으로 오늘의 내가 새로워졌다면 배움의 개인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겠지만, 그렇게 새로워진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 배움을 위치짓자고 하면 배움의 사회적 의미를 따져묻는 것이 된다. 즉, 배움에 임하는 사람은 지식의 특성에 따라 늘 유사한 부류의 지식 언저리에서 벗어나지 못 할 수도, 혹은 늘 창발적인 사고를 가져오는 지적 자극을 받을 수도, 어쩌면 지식다운 지식이나 지적 자극도 없이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배움이 완전히 개인적이라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교육이 사회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교육은 두 가지 상반된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회의 제도로서 교육은 그 사회의 전통을 유지, 존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흔히 학교교육을 ‘사회화’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교육은 또 다른 목표, 즉 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어 희망찬 미래로 나가게 해주는 동력이어야 한다고 기대된다. 한마디로 교육은 사회변화의 촉매이자, 곧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육은 곧 무언가를 변하지 않도록 지켜서 다음 세대의 구성원들에게 전달해야 하며, 동시에 기존의 것을 깨부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거나 혹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은 그대로 남아있어야 하고, 또 바뀌어 새롭게 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리고 이 일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누가 이 일을 옳게 한다고 하면 별 저항없이 모두 박수쳐 호응해 줄 수 있는가?
사실 이 둘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렇지만 이 둘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을 누구도, 어떤 사회도 포기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지점이 여기에 있다. 어찌되었건 교육이란 이름의 목표가 담고 있는 모순적 상황으로 인해 개인이건 사회건 누구도 자신을 둘러싼 교육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육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이란, 한마디로 시끄러움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어느 사회를 가서 보건 자신이 관련되어 있건 그렇지 않건 ‘교육’에 만족하며 평화로운 국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따라하고 싶어하는 많은 국가의 교육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따라하겠다는 생각이 쏙 들어갈 정도로 수많은 논쟁거리를 마주하게 된다. 교육 이슈? 불편함 그 자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소위 경제적으로 우월한 국가들의 교육뿐만 아니라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육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는 개념이고, 교육실천이란 그 모순을 둘러싼 수많은 이해관계가 맞부딪히며 싸움이 일어나는 쟁투의 장이다.
교육이 모순이라니? 창과 방패를 모두 다 잘 팔려는 무기상에게 던져진 질문, 즉 “당신 창이 당신의 방패를 뚫을 수 있나요?”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창이 모든 방패를 뚫어버릴 수 있다면 함께 파는 방패는 살 사람이 없을테고, 모든 창을 막아 내는 방패를 강조하면 창이 팔릴리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답하건 무기상은 거짓말한 것이 된다. 둘이 모두 성립되는 조건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어떤 답이 타당한지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직접 창을 방패에 던져보면 된다. 그러나 무기상은 절대 자기 창을 자기 방패에 던져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무기상은 자신의 논리가 간파되는 것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혹 그 ‘논리없음’이 누군가에게 간파된다고 하더라도 논리가 실증되지 않는 한 ‘논리없음’의 논리를 계속 떠벌리기 바란다. 어쩌면 자신의 ‘논리없음’을 간파한 사람(들)을 떠나 자신의 ‘논리없음’을 간파하지 못한, 아니 아직 간파할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옮겨갈 것이다. 어디선가 간파당한 ‘논리없음’은 다시 ‘논리적’인 외양을 띠고 울려퍼질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지 않은가? 이런 ‘논리없음’으로 치장한 무기상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 무기상은 어디서건 이런 성립하기 어려운 창과 방패의 논리를 들고 창과 방패를 팔아 먹고 산다. 어쩌면 누구보다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거나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는 곳이라거나, 무엇보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지역이라면, 더 극단적으로 전쟁의 규모가 크고 그 전쟁터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 무기상의 사업은 번창할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무기상에게 ‘당신 창으로 당신 방패를 뚫어보시오’ 하는 모순의 ‘논리없음’을 따져묻는 사람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간혹 그런 질문을 품는 사람들, 더 나아가 입밖으로 그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기상의 사업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즉, 무기를 구입하려는 사람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본능적 요구, 그 요구에 충실히 응하는 것이다. 자기 욕구(욕망)와 필요에 충실히 봉사한다면 그게 뭐든 그따위 ‘논리없음’은 굳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논리없음’을 문제삼다가 내가 죽는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있겠는가?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일의 결과로 무기상의 사업은 번창하고, 따라서 ‘논리없음’은 결코 우리 삶의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리 삶의 ‘모순’과 ‘역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개인의 욕구(욕망)과 필요가 집단적으로 성찰되지 않은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교육을 한다는 건, 교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런 모순적인 상황 속에 자신을 위치지운다는 말이 된다. ‘교육개혁’과 ‘교육혁신’이란 말을 앞세우고 누구는 ‘학생중심’을 내세우고, 누구는 ‘성적향상’을, 누구는 ‘교사전문성제고’를, 또 누구는 ‘경제성장’을 앞세운다. ‘교육개혁’은 누군가에게는 ‘교육에 대한 더 많은 투자’를 전제로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는 ‘교육으로부터 더 많은 성과를 얻어내는 산출’을 가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누구는 교육이 ‘혁신’되려면 교사를 존중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피토하는 울음을 내뱉지만, 누군가는 교육을 ‘혁신’하는데 교사가 걸림돌이라며 교사에 대한 관리감독, 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교육의 ‘개혁’은 ‘사회개혁’을 위한 출발점이고 이를 완성하도록 하는 과정으로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육개혁’은 ‘사회개혁’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사회개혁’ 없이 ‘교육개혁’은 의미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교육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교육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지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화법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우리 주변의 교육은 온갖 대립되고 모순적인 말 잔치 속에 자리잡고 있다. 교육이 늘 시끄러운 난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과 방패를 팔아 먹고사는 무기상처럼 교육이란 이름으로 ‘개혁’과 ‘혁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날로 번창한다. 이들에게 부여된 ‘권한’과 ‘권력’이 우리 주변의 교육적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말이다.
우리는 흔히 ‘개혁’과 ‘혁신’이란 이름을 붙여 우리 삶의 미래를 새롭게 전망하는 그림을 쏟아낸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가 신자유주를 이데올로기적 사회정책으로 실현해가면서 교육분야는 ‘개혁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변화를 일구어내려는 개혁과 혁신의 채찍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소위 ‘개혁의 시대’를 맞은 교육은 이때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교육의 내용은 지식의 표준화, 이런 지식의 전달방식은 선택과 개별화, 지식 습득의 평가방식은 일제고사화, 지식을 전달하는 학교의 유형은 다양화,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는 능력에 따른 등급화, 교육을 관장하는 전체 시스템의 축소와 민영화였다. 개혁으로 내세워진 미래 교육의 청사진은 ‘글로벌교육개혁운동(Global Education Reform Movement, GERM)’으로 통칭되었고, ‘개혁의 시대’ 화법은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답변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얽혀 있는 통일된 교육개혁의 화법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누르는 개혁의 동력에 의존했고, 이를 실현하려는 목소리는 대자본과 결탁해 작동했다. 이들의 화법은 집요하게 각 국가, 각 교육체제, 각 단위학교, 그리고 각 교육주체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글로벌교육개혁운동이 교육이 실천되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그 목표를 실현했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아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성취해 낸 한 가지를 분명하게 짚어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화법에 익숙해지면서 교육이 담고 있는 ‘모순적 의도’를 점점 더 읽어 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한 자기 욕망 충족에 만족하도록 이끌고 있다. ‘개혁의 시대’에 사람들은 교육의 사회적 의미가 아닌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최고의 공격력을 부여할 수 있는 창과 세상에서 최고의 방어력을 보유할 수 있는 방패를 한입으로 동시에 내놓는 무기상의 말도 안되는 ‘논리없음’에 점차 무기력하게 빠져들어가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화법은 한국 사회에서 ‘잘 살아보세’, ‘국가경쟁력제고’, ‘경제성장’의 구호와 함께 뒤섞여 30여 년간 울려퍼졌다. 2009년 교육자치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화법이 등장한 듯했다. 그러나 교육개혁의 화법들은 마치 다른 듯 보이지만 별 다른 차이점을 보이지 못하고 글로벌교육개혁운동의 연장선에서 아웅다웅거렸다. 교육개혁 30년의 성과는 우리를 옭죄어오고 있는 ‘능력주의의 덫’에서 실상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난리난 듯 전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은 수시 vs. 정시 대입전형 논란, 전 세계적 공중보건 위기 속에서 한 사회의 엘리트로 특권적 권한을 놓고 싶어하지 않는 의대생들의 집단 파업, ‘민중은 개돼지’라고 망언을 서슴지 않는 교육부 고위 관료의 고압적 태도, 정의와 공정을 외치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쉽게 휘둘리고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청년세대의 태도, 졸업한 고등학교, 대학 및 학과별로, 그리고 수능 성적 1-2점으로 만들어진 점수 계급을 사회계층으로 고착화해내는 대학생들, 대입에 도움 안 되는 것은 필요없게 만드는 사교육 시장, 이런 좁은 삶의 통로를 헤쳐나가다 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봉오리 한 번 못피고 져버린 꽃송이들. 여기에 한 가지 더할 것이 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 사회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가 되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는 이런 사회, 이런 시대, 이런 교육에서 다음 세대의 희망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다음 세대가 없는 사회에서 교육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뭔가 새롭게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것이 역설적이지 않은가? 당시 강조하지만, 이런 ‘지속가능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면모는 지난 30여 년 지속되어 온 교육개혁의 ‘성과’라는 점이다.
자연 세계에서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 그렇게 보일지 모르는 현상이 있다면 아직 우리가 모르고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우리가 모순적이라고 보이는 현상 뒤에 놓여있다. 따라서 자연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 사회의 이런 ‘지속가능하지 않은’ 현실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그 요소가 충분히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 사회가 왜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향으로 드러나는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불안함과 공포심, 지속가능할 수 없음에 목소리로 몸으로, 심지어 몸을 불살라 항의하는 이들을 통해 우리는 그 이유를 점차 더 분명하게 알아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사회에서 당연시하며 받아들여지고 있는 ‘교육개혁’은 온통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모순은 인간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자연 세계가 아닌 자신만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인위적 사회 속에서 자리한다. 지속가능하고 행복한 사회를 청사진으로 내놓은 교육개혁의 결말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라니. 더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평등한 사회, 차별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온갖 정책과 개입이 혐오와 차별, 두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니. 교육개혁은 모순, 그 자체다. 이런 교육개혁의 ‘논리없음’은 제대로 제어되지도, 그렇다고 심각하게 저항받지도 않은채 우리가 아닌 ‘나’와 ‘내 가족’의 욕망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실현해 낼 화법으로 버티고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여기 광야의 한 목소리가 있어, 교육개혁의 모순을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마치 신약성경의 한 구절을 연상케하는 표현으로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을 통해 이런 표현이 그다지 잘못되지 않은 것임을 말하고 싶다. 구약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이 이 책의 길고 풍부한 이야기의 큰 그림을 잘 표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골리앗 무찌르기: 미국의 교육개혁과 그 적들’이라는 제목의 이 번역서는 다이앤 래비치(Diane Ravitch) ‘Slaying Goliath: The Passionate Resistance to Privatization and the Fight to Save America’s Public Schools’(2020)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굳이 래비치 교수가 누군지 소개하는 것이 의미있을까 싶긴 하지만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래비치 교수는 1938년생으로 올해(2022년) 한국 나이로 85세 할머니다. 한국 교육학자들은 래비치를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교육학자로 읽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미국 공교육개혁의 역사를 탐구해 온 교육사학자로 1980년 이래 이어져온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최선봉에서 신보수주의적 학자로 명성을 날렸었다.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연방교육부차관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전후해 래비치 교수는 미국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다양한 싱크탱크의 연구 및 활동에 관여하며 교육을 통한 미국 사회의 번영을 위한 개혁적 청사진을 옹호해왔다. 래비치 교수는 당시 개혁적 화법으로 내세워졌던 표준화된 교육과정, 더 많은 일제고사, 학생 성적에 따른 교사평가 및 인센티브를 통한 교사 동기부여, 차터스쿨 및 학교선택제를 통한 교육민영화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여러 책에서 고백하고 있듯 래비치 교수는 교육개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바꾼다. 일종의 사상 전향자가 되었다. 미국 교육개혁 정책에 대해 극단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중도우파적 지지를 보내던 래비치 교수는 이제 극단적 저항세력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해 있다. 이 책처럼 학자로서 책을 내고 연구하는 일을 통한 저항뿐만 아니라 교육민영화와 표준화시험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찾아다니며 직접 피켓을 들고 거리 시위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온라인 블로그를 만들고 이 공간을 통해 교육적 저항 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온오프라인에서의 소통과 협력을 이어가며 교사, 학부모, 학생 및 시민들과 연대를 공고히 하는 전략가로 일하고 있다. 래비치 교수는 교육개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바꾼 이후 발간된 책에서 몇 차례 이런 입장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고는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래비치 교수의 전향을 단순한 변화로 보지 않는다. “과거의 내가 잘못되었다”는 식의 짧은 설명으로 래비치 교수의 전향을 퉁치고 넘어가기 어렵다고 본다. (이에 대한 래비치 교수의 인식론적, 실천적, 윤리적 변화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해본다. 혹은 언젠가 래비치 교수를 뵙고 이에 대해 꽤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책은 이런 역동적 삶을 살고 있는 래비치 교수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교육사학자로 탐구한 교육개혁의 어제와 오늘을 연구성과로 내놓은 것도 아니다. 이 책은 미국 교육개혁을 둘러싼 큰 싸움터를 그림 그리듯 보여준다. 골리앗을 앞세워 싸움터를 채운 블레셋 진영에는 내노라할만한 재벌들(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 리드 헤이스팅스, 코크 형제, 드보스가문, 월마트 가문 등), 금융계의 큰 손들, 정계의 지도자들(버락 오바마, 부시대통령 부자, 빌 클린턴, 도날드 트럼프 등), 소위 교육개혁의 간판 스타들(미쉘 리, 웬디 콥, 아른 던컨 등)이 뒤편에 자리잡고는 명문대 학맥과 인맥으로 연결된 정치인과 전문가들이 싸움꾼으로 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성인 갑옷조차도 헐렁해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체구의 다윗이 나선 반대 진영에는 지도자라 할만한 인물이 뚜렷하지 않은채 그만그만한 교사, 학생, 학부모, 기타 시민들이 자리하고 있다. 각자의 역할이 전문적으로 배정되어 그 역할에 충실한 전략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블레셋 진영과는 달리, 반대 진영의 병사들은 일인 다역을 하며 매순간 새롭고 창의적인 전략에 의존한다. 블레셋 진영의 군대가 전투복을 잘 갖춰입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상황이라면, 반대 진영에는 전투복은 둘째치고 과연 무기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를만한 것들을 들고 싸움에 임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둘의 싸움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뻔해 보인다. 그러나 이 책에서 래비치 교수는 이 싸움이 전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다윗이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긴 성경 이야기처럼 반대진영의 승리로 모아지고 있다고 전망한다. ‘진정한 교육개혁’을 바라보며 교육 대전환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이런 결말은 ‘희망’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래비치 교수의 이런 전망에 동의한다. 그러나 한가지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거대 자본에 맞서 싸워 얻을 수 있는 ‘승리’ 혹 ‘희망’은 어쩌다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갑자기 등장한 특출난 지도자에 의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영웅이야기를 잘 보면, 대부분의 영웅은 치열한 싸움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비록 영웅이 대단히 활약한 싸움에서 단기적으로 이겼을지 모르지만 역사상 전력이 높은 진영이 열세 진영의 사람들을 이기고 지배했다. 그렇다면 위에서 보여준 전쟁터의 양 진영간 우위를 보면 희망이 없는 것일까? 교육개혁이란 이름으로 자본가들이 쏟아붓고 있는 글로벌교육개혁운동 의제는 반대진영의 저항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래서도 절대 안 된다. 전쟁터를 채우는 이 싸움의 명분과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의 무기는 고정값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상수가 아니다. 지금 교육개혁을 둘러싼 싸움은 기원전 3000년경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맞붙어 싸우는 그런 싸움이 아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교육개혁 전쟁은, 좀 더 많은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위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땅 싸움, 노예 싸움을 벌였던 것과 다르다. 교육을 둘러싼 전쟁은 명분의 싸움이고, 얼마나 많은 개인과 사회가 이 명분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가의 싸움이다. 어떤 무기를 어떻게 누가 사용할 것인가는 그 다음의 문제다. 우리에게 닥친 교육의 ‘개혁’과 ‘혁신’이 담고 있는 화법에서 정당한 명분을 찾아내고 잘못된 명분을 찾아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것이 다윗과 골리앗으로 보이는 싸움을 대등한, 혹은 더 정당한, 더 정의로운, 더 교육적인 싸움의 모습으로 다시 보게 할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있다. 교육개혁을 둘러싼 전쟁이 명분의 정당성을 둘러싼 싸움이라고 할 때, 한 진영을 형성하고 있는 특권적 카르텔 집단의 수가 소수라는 점이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싸움 승리 전략과 연결된다. 즉,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는 다수의 인민이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지지하는 교육의 화법이 실천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 이 다수의 인민이 어떤 교육개혁 혹은 어떤 교육혁신의 화법이 정당한지를 검토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과정에 자본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 각 개인의 인식과 실천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이지 못한 체제식민화의 함정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명분있는 교육의 화법이 더욱 지지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래비치 교수의 이 책은 미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교육개혁을 둘러싼 전쟁을 소상히 설명하며, 누가 양 진영에 있는지, 전략은 어떻게 세우고 있는지, 이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떤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지, 무엇이 효과적이고 그렇지 않은지, 왜 그런지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죽고 사는 문제다. 교육개혁을 둘러싼 전 세계의 전쟁은 우리 개개인의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공존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출판사의 끈질긴 지원이 없었다면 이 책이 이렇게 번역되어 발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자가 연구년으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 책의 출간 사실을 알게되었고 번역할 수 있도록 출판사를 통해 판권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출판사로부터 ‘안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대체 왜?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래비치 교수의 책은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단 한 권, ‘미국의 공교육 개혁, 그 빛과 그림자’(지식의 날개)라는 제목의 책이 2011년 번역 출간된 것이 유일했다. 1974년 The Great School Wars를 출간한 이래 2020년 Slaying Goliath까지 총 22권의 단행본 중에 단 한권만 번역 소개되어 있었다. 전해들은 바로는 2011년도 래비치 교수의 번역서가 발간된 이후 다른 책의 번역을 시도했지만, 판권을 얻지 못해 결국 번역서 출간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따라서 래비치 교수에 대한 세평은 미국 교육에 관심을 갖고 영어를 읽을 수 있는 학자들 사이의 평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앞서 래비치 교수를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교육학자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를 이해할만한 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는 여러 차례 판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시도했고, 결국 번역 출간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이선경 차장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뿐만 아니라 편집과정에서 꼼꼼하게 윤문과 교정작업을 해주었고, 본문 사진 문제를 잘 해결해 준 배근하 과장께도 감사인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교육과 개혁을 다시 성찰할 수 있는 작은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면 출판사의 멋진 활약 때문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긴 시간 번역과 교정 작업을 묵묵히 지켜봐주고 매 순간 이런저런 탈맥락적 이슈들에 대화로 함께 해준 아내에게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모쪼록 이 책이 미국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애쓰는 모든 교육주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부디...

2022년 2월
유성상 쓰다

저자 약력
다이앤 래비치(Diane Ravitch)
교육개혁을 주제로 연구해온 교육사학자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컬럼비아대학교를 거쳐 뉴욕대학교에서 교육사 및 교육정책을 가르쳤다. 2020년에 퇴직해 명예교수로 있다. 래비치는 연방교육부의 차관(1991-1993), 미국학업성취도평가(NAEP)의 자문위원과 브루킹스연구원의 석좌연구원(1997-2005)으로도 활동했다. 2010년 이후 학교선택제, 차터스쿨, 표준화시험, 교원평가 등의 교육개혁에 대한 입장을 전면적으로 바꿔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온라인상의 교육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책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1974년 The Great School Wars: New York City, 1805-1973을 출간한 이후 이 책까지 22권의 단행본을 냈으며, 수백편의 논문과 교육논평을 발표했다. 2010년에 발간된 The Death and Life of the Great American School System: How Testing and Choice are Undermining Education은 미국의 공교육 개혁, 그 빛과 그림자(2011)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역자 약력
유성상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다. 미국 공교육과 교육개혁의 역사에 관심이 많으며, 공교육의 발전과 교육개혁의 과정을 통해 교육다운 교육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공교육체제에서 교사다움, 교사라는 직업, 교사 전문성이 어떻게 이해, 발현, 제한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는 배움의 조건(지식의 날개, 2020), 인권과 학교교육(2020, 박영스토리) 등이 있고, 스쿨: 미국 공교육의 역사 1770-2000(학이시습, 2014), PRIZE: 교육이 미래라고 믿는 당신에게(2017, 박영스토리), 교육을 바꿀 수퍼맨을 찾습니다(교육과학사, 2018), 교사전쟁(살림터, 2019), 교사교육의 딜레마(박영스토리, 2020), 교사가 되려 합니다(2021, 다봄교육) 등의 번역서가 있다.

제1장  파괴는 개혁이 아니다!  1 
제2장  혐오스런 지금의 교육  15
제3장  파괴자들이 원하는 것  35 
제4장  저항에 직면하다  69 
제5장  파괴운동 끝의 시작  103 
제6장  고부담표준화시험에 대한 저항  121 
제7장  포상과 처벌은 그리 좋은 동기유발 기제가 아니다  157 
제8장  미끼와 전향: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학교선택제를 지지하게 되었나  177
제9장  학교선택제, 탈규제, 그리고 부패  197 
제10장 저항운동의 반격  223
제11장 저항운동, 미 전역으로 번지다  263 
제12장 차터스쿨과 검은 돈  277
제13장 기적 아닌 기적: 뉴올리언즈와 플로리다  301
제14장 공통핵심과 실패한 개혁 떨거지  317
제15장 교사들의 반란  347 
제16장 골리앗이 비틀거리다  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