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6. 10. 20
“그 사람 때문에 못 죽겠어요.”
2010년 여름, 나는 서울의 한 좁은 단칸방에서 어느 어르신의 담담한 고백을 들었다.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노인들을 만나 심층면담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황 여사가 하도 친절하게 해 줘서, 그 사람 때문에 못 죽겠어요.”
이 짧은 말에는 기존의 자살 위기 개입 논리만으로는 충분히 해석하기 어려운 경험이 담겨 있었다. 노인의 삶을 붙든 것은 잘 설계된 프로그램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 꾸준히 안부를 살핀 노인돌보미, 곧 오늘날의 생활지원사와 맺은 신뢰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타인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이 자살 위험 속에서 흔들리던 일상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날의 만남 이후 나는 분절된 복지제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가 어떻게 한 사람의 자살 위험을 낮추고 삶을 이어가게 하는지를 연구의 화두로 삼았다. 2010년에 품기 시작한 이 질문은 2014년 <독거노인 친구만들기> 시범사업에 참여하면서 12년에 걸친 실천과 연구로 이어졌다. 나는 사업의 설계와 자문, 평가와 교육, 연구에 참여하며 고립과 자살 위험에 놓인 노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보았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만난 노인과 사회복지사의 경험, 실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재구성된 연구 질문, 그리고 그 해답을 찾아 축적해 온 실천연구의 기록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관계는 정서적 유대나 교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관계는 노인이 처한 위험을 세심하게 살피고, 외부의 지원을 경계하던 노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는 핵심 조건이다. 또한 분산된 서비스와 자원을 한 사람의 삶에 맞추어 연결하고, 상태와 생활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개입의 시기와 강도를 조정하는 실천의 기반이 된다. 이러한 관계가 단편적인 접촉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돌봄으로 이어지려면, 실무자 개인이 떠안아 온 책임을 조직과 제도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본서에서 말하는 ‘관계 기반 돌봄’은 노인의 변화가 가능하도록 관계를 형성하고 조정하며 지속하는 전문적 실천과, 그러한 실천을 뒷받침하는 조직적·제도적 조건을 모두 포괄한다.
현장이 보여 준 것들
12년 동안 현장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나는 기존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현상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한 경험이 있는 노인이 언제나 죽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노인은 삶을 이어 가려는 마음과 죽음을 선택하려는 충동 사이를 오갔다. 만성질환과 빈곤, 반복된 상실과 관계 단절이 죽음 쪽으로 기울게 했다면, 이웃의 안부 한마디와 자신을 찾아오는 사회복지사와의 약속, 다음 방문도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삶 쪽으로 당기는 힘으로 작용했다. 자살 위험은 개인 내부의 심리 상태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일상에서 지속되는 관계와 돌봄의 조건에 따라 위험의 방향과 강도도 달라졌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의 서비스 거부 현상 역시 개입을 방해하는 단순한 문제 행동으로 볼 수 없었다. 신체기능과 인지기능의 저하, 사회적 관계망의 단절, 우울과 불안, 부정적인 서비스 경험이 서로 얽혀 나타난 결과였다. 외부의 지원을 거부하는 행동은 오랫동안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생존 방식일 수 있었고,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인이 서비스를 거부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엇을 거부하는지, 누구의 접근을 부담스러워하는지, 어떠한 방식의 접촉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살펴야 했다. 처음에는 문을 열지 않던 노인이 어느 날 짧은 대화를 허락하고, 이후의 만남을 기다리게 되는 변화는 이러한 세심한 관찰과 반복된 접촉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공적 서비스가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제공한 결과가 아니었다. 존중받는 관계 속에서 노인이 접촉의 거리와 방식을 조절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힘을 조금씩 회복해 간 결과였다. 관계는 노인이 자신의 삶을 다시 주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회복의 과정이 일정한 순서와 속도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우울과 자살 생각은 완화되었지만 외로움은 그대로 지속되거나, 이전보다 더 뚜렷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담당자와는 가까워졌지만 그 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넓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회복의 여러 측면이 같은 시기에 함께 좋아지지 않았다. 한 부분이 회복되는 동안 다른 영역은 정체되었고, 어떤 변화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복합적인 양상에 대응하려면 단편적인 서비스 제공이나 일회적인 자원 연계를 넘어서는 실천이 필요했다. 노인의 상태와 관계, 생활환경의 추이를 오랜 시간 살피고, 필요한 서비스를 적절한 시점에 연결하며, 개입의 순서와 강도를 계속 조정해야 했다. 노인 돌봄은 개별 서비스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개입이 노인의 생활 맥락과 회복 단계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고 조정하는 돌봄 경로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로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경로가 공식적인 제도보다 일선 사회복지사의 추가 노동과 정서적 개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반복적인 방문과 연락, 접촉이 중단된 뒤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시도, 여러 기관과의 협의와 조정은 사업의 공식 절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무자는 제도의 빈틈을 메우며 관계를 이어 갔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정서적 부담을 감당했다. 사업의 성과가 확인되더라도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 내고 지속할 인력과 조직의 기반은 충분히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고위험 노인’이라는 이름이 포착하지 못하는 삶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노인들을 규정하는 행정의 언어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우울 수준이 높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인은 행정체계에서 흔히 ‘고위험 노인’으로 분류된다. 이 용어는 자살이나 고독사 위험이 커 공적 보호와 지원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대상을 뜻한다. 사회문제를 파악하고 한정된 예산과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 정책의 관점에서 이러한 분류는 일정 부분 필요하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노인, 여러 층위의 고립을 경험하는 노인,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으며 관계가 안전한지 가늠하는 노인, 우울은 완화되었지만 외로움은 지속되는 노인이 모두 ‘고위험’이라는 단편적인 범주 안에 묶여 있었다.
고위험 상태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단일 사건이 아니다. 오랜 시간 누적된 상실과 관계의 침식, 빈곤과 건강 악화, 구조적인 사회적 배제가 겹쳐 형성된 결과다. 그러므로 ‘고위험’이라는 이름은 지원의 필요성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위험이 형성된 구체적 맥락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노인이 어떠한 관계와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변화를 만들어 가는지도 담아내기 어렵다. 노인 자살과 고독사 문제를 고립된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를 사회적 소외와 관계 단절, 빈곤과 건강 악화, 기존 돌봄 체계의 한계가 결합한 사회적 현상으로 직시해야 하며, 개인의 위험을 확인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 위험을 형성하고 지속시키는 관계적·사회적 조건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고위험’ 노인 돌봄에 참여한 12년
나는 2014년 <독거노인 친구만들기> 시범사업의 자문위원으로 ‘고위험’ 노인 돌봄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이 사업이 평가와 보완, 확장을 거쳐 2020년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안의 특화서비스로 정착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2020년부터 2025년까지는 자문위원단장과 평가자, 직무교육 담당자, 연구자의 역할을 맡아 사업의 운영과 변화 과정을 밀착하여 관찰했다.
특화서비스는 고립과 자살 위험에 놓인 노인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공적 개입이었다. 이 사업은 우울과 자살 위험, 사회적 고립 수준이 높은 노인을 대상으로 단순한 보호를 넘어 심리사회적 회복과 관계의 복원을 지원하고자 했다. 한 사람의 심리 상태와 관계, 생활세계의 변화를 실천의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물품 지원이나 단편적인 자원 연계와는 다른 방향을 취했다.
이러한 실천 현장에 참여해 온 지난 12년은 내가 여러 역할을 수행한 기간인 동시에,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관점과 요구가 부딪히는 현장과 마주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각자의 관점과 경험이 어디에서 어긋나는지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해석하고 조율하며 실천의 방향을 함께 찾아야 했다.
사업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공무원과 사업 관리기관, 서비스를 수행하는 기관장과 사회복지사, 서비스를 이용하는 노인은 특화서비스에 서로 다른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사회복지사들 사이에서도 서비스의 목적과 실천 방향을 이해하는 방식은 같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는 수행기관과 실무자에 따라 실천이 달라지는 결과를 낳았고, 때로는 사업의 목적과 실제 운영 조건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사업 설계에 관여한 사람이 동시에 그 사업을 평가하면서 겪는 역할 갈등도 있었다. 나는 사업의 취지와 성과를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장에서 드러난 문제와 제도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했다. 사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일과 사업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은 쉽게 분리되지 않았다. 이러한 긴장은 사업을 운영하고 현장과 협의하는 과정에서도 반복되었다.
사업은 연 단위 예산 주기에 따라 운영되었고, 전담 인력은 자주 교체되었으며, 운영 조건도 수시로 달라졌다. 그때마다 자문과 교육을 통해 특화서비스의 목적과 취지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같은 설명을 거듭하는 일은 단지 소모적 과정에 그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실천 기준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 나는 사업의 취지와 목적을 현장에 전달하는 위치에 있다고 여겼으나, 도리어 현장에서 마주한 사례와 실무자의 질의를 통해 내 설명의 한계를 확인하고 끊임없이 수정해 나간 시간이었다.
현장이 바꾸어 놓은 연구의 질문
현장은 이미 정해진 지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곳이 아니었다. 기존의 지식이 실제 삶을 충분히 설명하는지를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실천 지식을 축적하는 곳이었다. 이 경험은 내가 근거 기반 실천을 이해하고 연구 질문을 세우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근거 기반 실천을 연구와 사업 설계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연구에서 확인된 근거와 실무자의 전문적 판단, 노인의 경험과 선호를 함께 고려하면서도, 실제 사업에서는 효과가 확인된 개입을 필요한 대상에게 제공하고 사전·사후 지표로 변화를 검증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 무게를 두어 왔다.
그러나 현장을 오래 지켜볼수록 프로그램의 제공과 지표의 변화만으로는 그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사례가 늘어났다. 개입의 효과는 노인의 생애 경험과 관계 조건, 서비스를 받아들이는 준비 정도에 따라 달라졌다. 우울 지표가 개선된 뒤에도 일상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관계의 어려움은 이어질 수 있었다. 수치의 변화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노인이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변화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나타났는지를 규명하기 어려웠다.
현장에서 만난 사례들은 내 연구의 초점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은둔 상태의 노인을 어떻게 발굴할 것인지, 어떠한 프로그램이 효과적인지에 집중했다. 이후에는 한 사람을 고립으로 이끈 생애사적 조건과 관계 경험이 무엇인지, 개입의 효과가 누구에게 어떠한 조건에서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탐구하게 되었다.
질문은 다시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우울이 완화된 뒤에도 외로움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인이 변화를 시도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인가?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던 노인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관계를 받아들이는가?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는 현장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관계를 지속하는 책임이 실무자 개인의 헌신에 집중되지 않으려면 조직과 제도는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이 물음들은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문을 열지 않는 노인을 거듭 찾아간 사회복지사의 경험, 노인의 거부를 새롭게 해석한 사례회의,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관계의 어려움이 이어진다고 말한 노인의 진술이 기존 연구 질문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현장의 사례를 마주하며, 나는 프로그램의 효과 여부만을 묻는 연구로는 노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과 조건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실천 경험을 근거로 전환하는 기록
그동안 특화서비스는 전체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수행기관이 아니라 일부 기관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이는 고위험 노인 개입에 필요한 전문성과 수행기관의 여건을 고려한 정책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2026년 3월 27일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노인맞춤돌봄서비스도 새롭게 정비되었고, 기존의 특화서비스는 특화지원 서비스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위험 노인을 담당하는 인력의 운영 방식도 달라졌다. 특화지원이 일반 전담사회복지사의 업무체계 안에서 수행되는 구조로 재편되면서, 전체 수행기관으로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그동안 축적한 집중 개입의 전문성과 현장의 실천 지식을 어떻게 유지하고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나는 현장에 축적된 경험을 실무자 개인의 숙련이나 기억에만 남겨두지 않고, 여러 실무자와 조직이 함께 검토하고 활용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로 전환하고자 하는 책임감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특정 사업의 성과를 정리한 보고서가 아니다. 특화서비스라는 제도적 사례를 통해 고립과 자살 위험에 놓인 노인의 삶,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변화, 그 변화를 이끌어 낸 실천적 판단,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과 제도의 조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기록이다.
이러한 분석은 노인 85명과 사회복지사·생활지원사 74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면담, 은둔형 사례관리 진행 사례 70건과 종결 사례 117건에서 생산된 사례기록 5,663건, 현장 간담회 진술, 수백 건의 슈퍼비전 자료와 연구일지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아울러 2020년부터 2025년까지 6년간 효과성 평가에 포함된 연인원 약 1만 5,400명분의 양적 자료를 통합적으로 분석했다. 서로 다른 시기와 위치에서 수집한 다층적 자료를 교차 검토하며, 관계가 어떠한 조건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고 어느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내는지를 면밀히 추적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형성된 질문과 12년 동안 사례와 자료를 들여다보며 도출한 답을 담고 있다. 모든 현장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단일한 정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실천이 누구에게, 어떠한 조건에서 작동했으며, 반대로 어떠한 조건에서는 한계를 드러냈는지 그 구체적인 맥락을 설명하려는 기록이다.
본문의 구성과 활용
전체 내용은 총 다섯 부로 이루어진다. 먼저 고위험 노인의 삶과 위험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관계 기반 개입이 설계되어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어 개입이 노인의 일상과 관계에 가져온 변화와 그 한계를 분석한다. 마지막에는 연구자로서 나의 위치를 성찰하고, 앞으로 검토해야 할 정책 과제를 제시한다.
현장의 사회복지사는 이 책에서 고위험 노인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관계를 형성하고 개입의 방향을 조정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수행기관과 지원기관의 관리자는 신규 실무자 교육과 사례회의, 슈퍼비전에서 함께 검토할 관점과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과 연구자는 현장의 경험이 어떻게 연구의 근거가 되고, 연구에서 얻은 지식이 어떻게 다시 실천의 언어로 돌아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현장의 딜레마에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다림과 개입, 자기결정과 보호 사이에서 실무자가 무엇을 관찰하고 비교하며 판단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의 근거를 세우고, 그 판단을 동료에게 설명하며 함께 검토할 수 있는 언어를 마련하는 것이 이 기록의 중요한 목적이다.
이제 서문에 인용했던 노인의 발화로 돌아간다.
“그 사람 때문에 못 죽겠어요.”
이 짧은 말은 한 사람의 삶을 붙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돌아보게 하는 화두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어떠한 관계와 실천, 조직과 제도를 통해 위기에 놓인 사람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지 답을 찾게 한다.
관계는 저절로 돌봄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삶을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세심한 판단, 반복된 접촉과 조정이 요구된다. 그 관계가 실무자 한 사람의 책임과 헌신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뒷받침하는 조직과 제도 역시 마련되어야 한다.
이 책의 기록이 고립된 노인의 삶에 변화를 만드는 관계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데 쓰이기를 바란다. 나아가 그 관계를 지속 가능한 돌봄으로 뒷받침할 실천적·제도적 조건을 논의하고 마련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되기를 바란다.
경북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12년 넘게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고립과 자살 위험,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의 삶을 연구자이자 실천가로서 가까이에서 마주해 왔다. 현재 보건복지부 통합돌봄 전문가 자문단과 통합돌봄 지역계획 컨설턴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노인맞춤돌봄 특화서비스 자문위원단장을 역임했다. 정책과 현장의 경험을 연결하고 이를 다시 연구의 질문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주력한다.
미국의 너싱홈(nursing home)과 생활지원시설(assisted living facility)에서 치매 노인과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치매 가족의 돌봄 경험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후, 노년기 자살과 학대, 사회적 고립, 취약한 주거환경 속에서의 나이 듦(aging in place)으로 연구의 범위를 넓혀 왔다. ‘고위험’ 노인 돌봄에 관한 실천연구를 이어오면서, 위험이 심화된 이후의 개입뿐 아니라 위험이 커지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접근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지난 20년간 탐구해 온 관계 기반 실천, 관계적 주체성, 서비스 수용, 돌봄 경로, 노쇠 예방이라는 주제들을 연결하여 지역사회 노인 돌봄 개입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구축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에이징 인 플레이스』(학이시습, 2025), 『근거기반실천과 사회복지』(집문당, 2015)가 있다. 2026년 한국노년학회 전기학술대회 우수논문상, 2025년 경북대학교 우수 강의상을 비롯해 교육부 표창장(2023), 보건복지부 의료·돌봄 통합지원사업 표창장(2023), 보건복지부 취약노인 보호 표창장(2020)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차례
•PART 1•위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삶의 조건과 이해의 틀
CHAPTER 01 장수의 시대, 노년을 지탱할 기반은 충분하지 않았다 3
section 01 준비할 겨를도, 대신할 안전망도 없는 노년 5
section 02 현재의 위기는 생애에 걸쳐 형성된다 8
section 03 고립은 어떻게 삶의 기반을 약화시키는가 12
section 04 존재론적 피로: 길어진 하루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 15
CHAPTER 02 고위험 노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위험·회복·고립의 형성과 변화 21
section 01 위험 점수에서 삶의 맥락으로 23
section 02 자살 위험은 어떻게 심화되고 완화되는가 27
section 03 ‘다시 살아보자’라는 마음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34
section 04 서비스를 거부하는 ‘숨겨진 이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8
•PART 2•관계 기반 돌봄의 설계와 제도화
CHAPTER 03 고위험 노인 돌봄은 어떻게 제도가 되었는가 49
section 01 ‘친구’라는 이름의 실험: 행정망 밖의 고립된 노인을 찾아가는 실천 51
section 02 관계 형성 그 자체가 개입이다 55
section 03 시범사업이 제도가 되면서 남긴 것과 남기지 못한 것 60
section 04 이 실천에 이름이 필요한 이유 64
CHAPTER 04 우울형·은둔형 개입의 논리와 실제 71
section 01 우울형 개입의 설계: 치료·상담·집단활동을 잇는 사례관리 73
section 02 은둔형 개입의 설계: 장기 접촉과 생활문제 해결을 잇는 사례관리 78
section 03 개입 과정의 측정 설계: 단축 척도의 개발과 해석 논리 82
section 04 표준을 사례에 맞게 적용하는 네 가지 판단 85
•PART 3•돌봄이 실행되는 현장: 조건·경험·판단
CHAPTER 05 같은 설계, 다른 실행: 사업 운영의 조건과 격차 97
section 01 누가 서비스에 들어올 수 있었는가: 발굴과 선정의 지역·제도 격차 99
section 02 개입을 어렵게 하는 여섯 가지 장벽 103
section 03 설계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다층적 지원체계 109
section 04 실행의 차이를 만든 기관과 지역의 조건 113
CHAPTER 06 노인은 서비스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거부와 기다림 사이 121
section 01 서비스를 알게 되고 첫 참여에 이르기까지 123
section 02 어떤 곳인지 알아가고, 무엇을 거절할지 판단하며 127
section 03 조금씩 달라진 하루들: 외출, 관계, 그리고 기다림이 만든 변화 129
section 04 문을 열지 않았다고 관계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다 133
section 05 서비스가 채우지 못한 자리 138
CHAPTER 07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다듬어지는 임상적 판단:
실천가의 숙련과 조직의 책임 147
section 01 첫 방문의 불확실성을 다음 질문으로 이어 가기 149
section 02 거듭된 만남으로 평소의 모습을 파악하고 변화를 해석하기 153
section 03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로 다시 판단하기 158
section 04 개인의 판단을 조직의 지식으로 축적하기 164
•PART 4•숫자와 삶으로 읽는 변화와 성과
CHAPTER 08 우울 점수가 낮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위험 노인 돌봄의 다층적 평가 175
section 01 성과지표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변화 177
section 02 RE-AIM으로 도달·실행·지속을 함께 살피기 181
section 03 혼합연구로 숫자의 변화와 삶의 경험 연결하기 187
section 04 실재론적 관점으로 돌봄의 작동 경로 이해하기 191
section 05 평가 결과를 실천과 제도 개선에 반영하기 195
CHAPTER 09 성과의 양상: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남아 있는가 203
section 01 여러 해에 걸쳐 확인된 위험 감소와 강점 회복 205
section 02 회복은 영역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211
section 03 은둔형 사례의 종결은 다섯 경로로 나뉘었다 216
section 04 어떤 조건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이어졌는가 222
section 05 성과가 지속되려면: 가족과 돌봄의 연속성 226
•PART 5•근거 생산의 윤리와 지속 가능한 돌봄 체계
CHAPTER 10 근거 생산과 제도적 환류: 명명·해석·활용의 책임 237
section 01 내부자의 맹점: 현장과 연구의 경계에서 놓친 것들 239
section 02 닫힌 문 앞에서 재구성된 질문: 현장이 연구의 화두를 바꾸다 242
section 03 명명(命名)이 삶의 총체성을 가릴 때: 대상화와 이상화의 함정 245
section 04 누구의 시간으로 구축된 근거인가: 데이터의 이면과 현장의 피로 248
section 05 제도의 유산과 과제: 실천 지식의 계승과 환류의 조건 252
CHAPTER 11 관계 기반 실천을 지속 가능한 돌봄 체계로:
고위험 노인 돌봄의 제도적 과제 261
section 01 가족은 실제로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 돌봄 책임의 범위와 한계 262
section 02 복지 혼합의 불균형: 공공·시장·공동체·가족의 책임 265
section 03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위축되는 주체성:
자기결정을 존중하고 보호를 판단하는 실천 원리 271
section 04 분절된 제도에서 통합적 돌봄 경로로 273
section 05 관계 기반 돌봄의 지속을 위한 다층적 과제 277
에필로그 285
이 책의 연구 기반: 주요 학술논문, 정책·사업 보고서와 현장 실천 도구 288
색인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