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6.08.31
머리말
법정채권론, 언제 이 책을 써야 할까 망설이기를 수 차례, 작년 겨울 서설이 별빛에 반짝이던 연구실 창가에서 문득 제목을 입력했다. 지우고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쓰고. 이렇게 시작된 설핀 글 조각들이 모여 이제야 빛을 본다. 약정채권과 구별하는 대목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푸르게 차가운 별빛과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들이 까만 하늘을 배경 삼아 어지럽게 흔들렸다. 대학 강단에 첫발을 딛고 법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잘 모르던 시절, 머리에 채워진 것은 없고 가슴에만 한 글자 한 글자 법학의 언저리를 헤매던 기억들로 가득하였다. 그때는 선한 의욕이라고 생각했지만 겁이 없었고 바쁘게 살았다. 해답이라고 믿은 어떤 것이 머리에 떠 올랐을 때, 나는 무작정 그것을 무의식 속에 나타난 나의 결론으로 삼았다. 그렇게 40여 년을 법학과 함께 길 양쪽의 키 큰 플라타너스를 스쳐 걸어왔다. 길에서 종종 나는 나 자신을 잃었다. 당시에 나는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법학을 이해하는데 논리적 사고가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감되는 면이 적지 않다. 여기에 더해져야 할 요소로 창의적 사고를 추가하려고 한다. 창의적 사고는 사려깊은 모방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도 말하지만(볼테르), 발생하는 모든 사례에 경직된 법규범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법학자의 창의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법학이 새로운 자연적 사실을 발견하려는 학문은 아니지만,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는 무지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성의 지팡이가 인도하는 창의력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법학은 개념의 설정부터 해석과 적용에서 사실을 규범으로 이끌고 그 해석을 통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의제(fiction)로 점철된다. 의제와 의제의 연결고리에 창의력이 더해져 논리적 이성이 완성된다.
무지한 나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 간절함에 스스러운 마음으로 책 내기를 감행하였다. 법정채권론을 한 그루 플라타너스로 삼아 오래 전에 잃었던 나의 길을 찾으려 한다. 우선 민법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본개념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법학자들의 실수 중 하나가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개념의 이해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념에 더하여 이론 구성이 논리적이어야 하고, 그 결론은 실제 사례에 부합해야 한다. 법학자의 창조적 사고가 구현된 다양한 이론이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구체적 현실이 반영된 법률문제의 해결책을 집적하는 역할은 재판을 통한 법원의 몫이다. 내가 안다고 생각한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해답을 이 책에서 조금이나마 정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법정채권론은 법률관계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원인들을 다루고 민법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내용으로 구성된다. 법학도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매운 음식 맛집과 같은 존재이다. 이 책은 첫째, 다소 분량이 늘더라도 기초개념부터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둘째, 법정채권론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계약법이나 물권법 등에 관련된 원리를 추가하여 민법 전반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셋째, 실제 사례를 가능하면 현실에 부합하고 적절한 이론적 참고가 될 만한 것으로 선택하였다. 추상적인 이론 설명에 그치지 않고 실례를 들어 그 적용과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제시하였다. 넷째, 중요 판례는 그 요지뿐만 아니라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하급심 법원과 대법원의 결론 및 그 차이를 밝혔다. 다섯째, 법학과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도 참고사항으로 추가하여 본문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책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시작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만 적당히 채우면 될 줄 알았다. 한 문장에 더하여 한 면을 완성하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면서 결코 시작은 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쓴 글을 다시 읽고 수정하고 보완하고 삭제와 대체를 반복하면서 책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어 가능하였다. 나를 잊고 플라타너스 늘어진 길을 걸을 때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아버지(정기숙 전 서기관)와 하늘에서 굽어보실 어머니(김영선 여사), 곁에서 사랑과 평안을 지켜준 아내(감성혜)와 두 아들(원태, 원석)에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을 글로 남긴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민법학의 길로 이끌어 주신 김욱곤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신 많은 교수님들, 선배와 동료, 후배들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늘 다 하지 못한 일이 내일 나의 숙제가 될 것 같아 남기고 싶지 않았고, 내가 영원히 다 하지 못하고 던져 둔 그 일은 다른 사람의 소망이 되어 언젠가는 완성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초고 전부를 세밀하게 읽어서 비판적인 의견의 제시와 함께 적지 않은 오류를 지적해 준 목포대학교 박석일 교수와 중요 논점의 이해에 도움을 준 서울대학교 이성범 교수, 판례와 법령을 확인하고 오탈자를 꼼꼼하게 잡아준 박승민 박사에게 깊이 감사한다. 이들로 인해 내가 찾고자 한 이성의 달빛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책 내기에 용기를 북돋아 주신 박영사 안종만 회장과 안상준 대표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글자 한 자 한 자, 문장 하나 하나 꼼꼼하게 다듬어 준 김선민 이사, 책 내는 과정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해준 정연환 과장에게 감사드린다.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감상과 비평, 이해와 격려를 바란다.
2026년 8월 15일
명륜동 연구실에서
정상현
정 상 현(鄭相鉉·Sang Hyun JUNG)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법학석사, 법학박사
영남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 역임
미국 American Univ. 교환교수, 중국 Jilin Univ.·일본 Osaka 법학회 방문학자
한국민사법학회 수석부회장, 한국재산법학회·한국토지법학회 부회장
사법시험, 행정고시, 입법고시, 변호사시험, 법학적성시험(LEET), 변리사, 공인노무사, 감정평가사, 공인중개사, 주택관리사 등 시험위원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하자심사분쟁조정위원회·한국의료분쟁조정위원회 조정위원, 국방부계약심의위원회 심의위원, 해양수산부계약심의위원회 심의위원, 경기도집합건물관리지원단 지원위원 등
[주요 저서 및 논문]
불법원인급여제도론, 현대사회와 민법(공저), 현대사회와 가족법(공저), 법학개론(공저), 계약법(공저) 등
계약금 교부의 법률관계 재검토, 무권대리인책임의 근거에 관한 시론, 대리권 남용행위에 대한 효과차단의 근거와 대리본질론의 역할 재검토, 변제자대위의 부담액 산정방식 재검토와 민법 제482조 제2항의 개정제안, 공동불법행위의 체계와 민법 제760조의 재해석, 민법상 법정이율의 변동제 전환 가능성에 관한 시론(공저), 전용물소권의 인정여부에 대한 법리 재검토(공저), 성공보수약정에 대한 외국법의 규율동향, 부동산 명의신탁법리의 기초 서설, 허가 없는 토지거래계약의 효력에 관한 법리 소고, 책임능력있는 미성년자의 불법행위와 감독자책임, 부동산의 이중매매와 제1매수인의 보호, 부부재산계약과 약정등기의 활용방안, 특별연고자에 대한 상속재산의 분여제도, 부부간의 계약취소권에 관한 일고찰, A Comparative Legal Study on the Ex Turpi Causa Non Oritur Actio Principle, 등 120여 편
차례
서론•1
I. 의의 3
II. 약정채권관계와 구별 4
III. 발생원인 4
사무관리•7
I. 사무관리의 의의 9
II. 법적 성질 10
III. 사무관리의 유형 11
IV. 성립요건 13
V. 사무관리의 효과 19
VI. 사무관리의 종료 25
부당이득•27
I. 서설 29
II. 부당이득 반환청구권의 근거 45
III. 성립요건 53
IV. 부당이득의 반환 74
V. 특수한 부당이득 92
불법행위•117
서설 119
I. 불법행위의 의의 및 구별개념 119
II. 특별법의 발전 120
III. 형사책임과 차이 122
IV. 과실책임주의와 무과실책임 123
일반 불법행위의 성립요건 126
I. 가해행위 126
II. 손해발생 149
III. 인과관계 173
일반 불법행위의 효과(손해배상) 188
I. 손해배상 개설 188
II. 손해의 유형과 산정 193
III. 손해배상의 범위 202
IV. 손해액 공제 207
V. 손해배상액의 예정 220
VI. 손해배상자의 대위 222
VII. 손해배상청구권 223
특수 불법행위 231
개관 231
타인의 가해행위에 대한 배상책임 232
I. 감독자책임 232
II. 사용자책임 249
III. 도급인책임 269
물건으로 인한 손해의 배상책임 270
I. 공작물 점유자·소유자책임 270
II. 동물 점유자의 책임 284
공동불법행위책임 286
I. 개요 286
II. 유형과 성립요건 289
III. 손해배상책임 300
특별법의 불법행위책임 325
I. 의료과오책임 325
II. 자동차의 운행자책임 336
III. 국가배상책임 351
IV. 제조물책임 365
V. 환경오염책임 372
VI. 산업재해 손해의 배상 382
VII. 전문가책임 382
참고문헌•395
색인•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