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발행 2026년 4월 27일
역자 서문
이 책은 독일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형법학자인 라이너 차칙Rainer Zaczyk 교수의 1989년에 발간된 초기 대표작, <미수범의 불법성>이 저작Das Unrecht der versuchten Tat은 독일에서 이미 200년 넘게 논의되어 온 미수범의 불법성에 대한 근본적인 난제를 다루면서, 이에 관한 이론의 현황을 체계적이고 비판적으로 면밀히 분석하고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적 자유의 정립. 칸트와 피히테의 법철학에 입각한 고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수의 불법성에 대한 법철학적인 근거를 매우 독보적이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라는 교수자격논문 중 ‘(불)법의 기초이론’에 관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번역을 진행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용적인 것으로서, 이 저작에서 저자가 천착한 ‘인간의 자유와 법의 관계’에 대한 접근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 자유가 중심이 되는 ― 모든 법체계에 필요한 법철학적인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와 법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며,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징인 자율성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없이는 (형)법이 직면한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거나 타당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법을 사실성에만 한정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실정법만을 법으로 여긴다면, 이는 법을 권력에 내맡기는 것과 다름없으며,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단순히 경험적인 법은 페드루스Phaedrus의 우화에 등장하는 나무로 만든 머리처럼 겉보기에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사유 능력이 결여된 뇌 없는 머리에 불과하다.
또 다른 이유는 실용적인 것으로서, <미수범의 불법성> 전편을 번역하는 작업은 분량이 매우 방대하여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요구되므로 현실적으로 역자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며, 주제면에서도 형법의 특수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반면 ‘법적 자유의 정립’은 독립된 내용으로서 형법에 국한되지 않고, 법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독자층이 읽을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이 부분을 번역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결정에는, 책의 내용과 한국의 독자들을 고려할 때 전편 번역이 아니라 부분 번역 역시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저자의 격려와 동의가 있었음을 밝혀둔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의 학문적 특성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 책의 핵심 사상과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의 저자인 라이너 차칙(Rainer Zaczyk, 1951-2024)의 주된 관심사는―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저자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단행본으로는 <자기존재와 법>, 토담미디어, 2018; <형법상의 불법과 피해자의 자기책임>, 토담미디어, 2019; <자유와 법>, 박영사, 2021; <법철학자로서의 칸트>, 박영사, 2024, 모두 라이너 차칙/손미숙 옮김; 논문으로는 “체계적 형법의 필요성과 ‘단편적 형법’의 개념”, 라이너 차칙/손미숙 외 공역, 형사법연구 제25권 제1호 (2013), 471?492면 등이 있다.
― 주체의 자유, 인간의 자율성으로부터 법의 근거를 확립하는 문제에 있었으며,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많은 연구를 통해 (형)법의 개별 쟁점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관철해 나갔다. 자유의 (형)법철학에 토대를 둔 저자의 학문적 여정은 <피히테의 법론에서의 형법Das Strafrecht in der Rechtslehre J. G. Fichtes>(1981)이라는 매우 획기적인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미 이 첫 저작에서 법의 상호주관성과 법의 근본 문제, 법인격의 개념, 국가이론 및 형법이론과의 연관성이 정교하게 도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법관계 개념 또한 처음으로 기본적인 윤곽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의 저작들을 통해 법관계는―<법적 자유의 정립>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국가 안에서 법적으로 구성되고 형사 불법을 통해 침해될 수 있는 이성적 존재 간의 관계로서 정식화되었으며, 이는 형벌의 근거를 확립하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실정(형)법과 그 이론에 대한 차칙의 시각 전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맥락에서 이 책의 요점을 정리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칸트와 피히테의 통찰에 입각하여 법인격의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개인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휘하는 실천 이성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의 근거는 개인 간의 상호 승인(= 인정) 관계에 있으며, 이 관계는 올바른 실천적?외적 행위를 통해 정립된다. 인간(= 법인격)의 현존재는 개념적으로 파악되어 올바른 행위를 규정하는 자유의 여러 요소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자유의 현존재 조건들을 법익이라고 부르며, 법익은 각 개인의 올바른?실천적 행위를 통해 현존하게 되고 그 내용 또한 형성된다.
이런 이유로 법익은 개인 상호 간의 승인 과정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산출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이 책의 제목과 본문에서 ‘정립Konstitu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법적인 자유의 존재가 고정된 전제가 아니라, 형성의 과정인 동시에 그 결과이며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나아가 개인들의 정립적인 능력과 성과는 타자와의 다양한 만남의 방식에 따라 근원적인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 구성되는 개인적 법익, 사회적 법익, 그리고 자유주의 국가적 법익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때 국가의 차원은 법익을 (법률상) 보편적으로 승인된 것으로 정립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더 이상 상호적 인간관계와 같은 원초적 정립만으로 특징되지 않으며, 확립된 보편성에 대한 자유로운 승인을 통해서도 규정된다.
이처럼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칸트가 말한 인간의 생래적인 유일한 권리인 자유의 현존재 조건을 피히테의 법철학적 성과를 토대로, 개인에서 출발하여 사회와 국가로 나아가는 구조 및 법익의 정립 과정을 매우 경이로운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차칙의 저작 가운데 한국어로 번역된 다섯 번째 단행본이다. (형)법학 분야에서 한 저자의 사유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타 언어로 번역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번역 작업이 지속되어 온 이유는―인간 존엄의 개념을 완성한―칸트로부터 비롯되는 독일 관념철학의 ‘자유’에 뿌리를 둔 저자의 법사상에 대한 역자의 확신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법관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심화되며, 나아가 (형)법의 개별 문제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확장되는지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표지 안쪽에 소개된 저자의 다른 한국어 번역서들을 함께 참고할 것을 권한다.
끝으로 법(인간의 자기존재)을 삶으로, 삶을 법으로 보여준 이 책의 저자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2026년 일월
손미숙
저자 약력
라이너 차칙(Prof. Dr. em. Rainer Zaczyk)(1951~2024)
라이너 차칙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1980년 피히테의 법론에서 형법이라는 연구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7년 미수범의 불법성이라는 연구로 법학교수 자격을 취득하였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와 트리어대학교에서 재직했으며, 2002/03년 겨울학기부터 2019년 여름학기까지 본대학교에서 형사법 교수 및 법철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2019년 정년퇴임하였다. 교수취임강의(1988)와 정년퇴임강의의 제목은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문장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였다. 주요 연구분야는 독일 관념론의 법철학과 형사법의 기초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역자 약력
손미숙(Dr. Misuk Son, LL.M.)
손미숙은 독일 트리어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차칙 교수와 후임 교수의 연구실에서 4년간 조교로 일하였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오랫동안 독일 프라이부르크 막스플랑크 외국 및 국제 형법연구소(현 막스플랑크 범죄와 안전 및 법연구소)에서 동아시아법 연구원으로 재직하였고, 지금은 서울에 거주하며 동 연구소의 외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어, 한국어, 영어로 발표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차칙의 자기존재와 법, 형법상의 불법과 피해자의 자기책임, 자유와 법 및 법철학자로서의 칸트이 있다.
이메일: sonm.korea@googlemail.com
차례
역자 서문 1
서언 9
제1장 개인의 자율성과 법관계―법철학적인 토대 12
Ⅰ. 칸트 12
1.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유의 증명 12
2.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에 대한 적극적 규정 21
3. 칸트에 대한 비판적 입장 30
a) 아도르노 31
b) 헤겔 33
4. 법에서 자유의 현현 37
Ⅱ. 피히테 50
1. 문제에 대한 피히테의 접근방식 50
2. 자연법에서 출발점의 확장 54
3. 피히테 이론의 성과 62
Ⅲ. 중간 결론 66
제2장 법관계의 첫 번째 구체화 68
Ⅰ. 예비적 규정 68
Ⅱ. 법관계의 기본 내용: 생명 69
Ⅲ. 신체 71
Ⅳ. 자유와 소유권 73
Ⅴ. 이 책의 전개에서 이 규정들이 갖는 의미 75
제3장 법관계의 두 번째 구체화 77
Ⅰ. 긴밀한 상호 인격관계의 해체 77
Ⅱ. 법익의 사회적 정립 78
1. 정립의 특징 78
2. 예시 81
a) 환경 81
b) 법률관계에서 문서에 대한 신뢰 83
c) 법원의 사실조사 84
3. 제정자의 실천능력 86
Ⅲ. 보론: 시간적으로 제약된 요소로서의 법익 88
Ⅳ. 결론 92
제4장 국가와 자유의 법적 정립 94
Ⅰ. 국가 차원의 필요성 94
1. 법관계에 대한 접근방식 94
2. 헤겔의 강제국가와 오성국가 개념의 거부 96
3. 국가와 개인: 국가계약 98
Ⅱ. 국가에 대한 더 상세한 구체화 101
Ⅲ. 국가의 법익 108
1. 특성 109
2. 개인의 국가적 법익과의 관계 110
a) 일반 국민으로서의 관계 110
b) 공직자로서의 관계 112
3. 국가적 법익의 법적 확정에 관한 문제 113
요약 115
사항색인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