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 12. 01
저자 서문
필자가 기업 경영으로 평생을 보내다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역사 공부에 뜻을 두고 석·박사 과정을 밟게 되면서 줄곧 뇌리를 떠나지 않은 큰 두 가지 자문의 주제가 있었다. 첫째는 역사가 왜 중요한가이고, 둘째는 우리나라 역사는 고대의 만주벌 일대와 한반도에 걸친 대제국으로 시작했는데, 왜 고려 중반 이후 점차 강역이 축소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첫 번째 자문에 대한 해답은 오히려 쉽게 나름대로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뿌리를 찾고,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키운다. 무엇보다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 역사는 우리의 존재 자체와 직결되는 근본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만학도로서 희망과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문, 즉 왜 우리나라 역사는 통일신라 이후 발해가 망하고, 고려 중기를 기점으로 계속해서 역사가 축소 내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하는 점은 그 해답이 쉽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 원인으로 우리나라의 철기문화가 중국보다 뒤처
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얻은 결론에 따르면 신용하 교수가 지적한 대로 고조선의 철기문화 역시 중국보다 오히려 앞섰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의 쇠퇴를 삼국시대까지의 왕성했던 상무 정신의 소멸 내지 쇠퇴와 연관시키는 것은 몰라도, 철기문화의 유입시기과 연관시키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일제에 의한 조선사편수회를 통한 의도적인 식민사관의 주입과 교묘한 역사왜곡 내지 축소·말살 작업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재야 학자들의 논문과 저서가 발간되었고 그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많이 열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스스로 ‘나는 식민사학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이제 한 사람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현상일 뿐, 내용적 면에서는 아직도 일제가 구축해 놓은 ??조선사??의 프레임, 즉 한국의 북쪽에는 평양에 한사군이 있었고, 그를 통해 400여 년간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수받아 문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과, 또 남에는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00년 이상 한반도 남쪽은 야마토 왜의 ‘임나일본부’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는 식민사학의 기본 틀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지난번 ??전라도천년사?? 편찬에서 여실히 입증된 서글픈 우리 역사의 현주소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 축소의 근저에는 일제나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침탈을 방관 내지 동조하는 더 근본적인 내면의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역사관의 문제인 것이다.
중국의 역사 기술은 한무제 때인 B.C. 1세기에 사마천이란 걸출한 역사가에 의해 ??사기(史記)??로 집대성된 이래 연연세세 왕조가 바뀔 때마다 역사 기록을 남겨 <25사>에 이르고 그것이 중국 역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 일본은 백제가 망한 후 A.D. 720년에 일본의 자주적 역사관을 확립한다는 분명한 목적하에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자국의 역사를 1,000년이나 끌어 올려 B.C. 660년에 시작된 것으로 만세일계의 역사를 금과옥조로 삼아 후대를 가르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현존 역사서의 대표는 김부식이 1145년경에 쓴 ??삼국사기??와 1281년경에 쓴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다. 그 당시만 해도 김부식이나 일연은 당시의 현존 역사서인 고구려의 ??유기??나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등 많은 역사서를 참고하여 역사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참고문헌인 역사서는 현재 후손인 우리에게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왜일까? 물론 오랜 세월 잦은 병화를 겪으면서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손에 의해 축소·왜곡·멸실되었다는 부끄러운 역사가 근본 원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인 유학에 경도되어 중국에 대항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 기술을 대폭 축소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금나라의 간섭을 받아 삼국의 왕이 각자 사용한 연호를 없애고 광개토태왕 비문에 관한 웅혼한 기록도 없애고, 중국 사서에 나와 있는 대륙백제의 기록이나, 백제의 열도 경영에 관한 기록도 다 누락시킨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결정적인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행해진 대규모 역사서 수거령이다. 즉, 성리학적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은 태종 이방원이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국에 역사서 수거령을 내린 이후 예종과 성종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이러한 망국적 역사서 수거령으로 폐기 또는 멸실한 책자의 목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의 1,000년에 걸쳐 우리 손으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폄하하고 축소하는 데 골몰해 왔으니, 그러고도 어찌 나라의 융성을 바라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비유하자면 서커스 공연에 동원된 코끼리가 한쪽 발목에 걸린 가느다란 말뚝 사슬에 순치되어 전혀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훈련을 감내해 나가는 형국과 비견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새삼 전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여기에 덧붙여 일제강점기에 전국에서 강제로 수거하여 멸실·훼손한 20여 만 권의 역사서가 결정타를 입힌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남의 탓을 하기 전에 스스로의 열패적 자기 비하의 역사관에 대해서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이웃나라의 예를 살펴보자. 중국은 일찍이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면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여 역사기술의 엄정을 강조하는 한편, 3가지 역사기술의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가 위국휘치(爲國諱恥)라 하여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기록은 숨긴다는 것이요, 둘째 존화양이(尊華攘夷)라 하여 자기 민족의 역사는 높이고 주변 국가는 오랑캐의 역사로 폄훼하여 낮춰 기록하게 한 것이며, 셋째 상내약외(詳內弱外)라 하여 국내문제는 상세히 기록하되 변방 역사는 대충 기록해도 된다는 것이 그 핵심내용이다.
얼핏 보면 이는 역사왜곡을 교시하는 내용으로 비칠 수 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역사기술의 본령을 제시한 3가지 지침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기록은 자존감을 높이고 부끄러운 기록을 함부로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 이 지침의 본령이지, 결코 거짓으로 사실을 왜곡·조작하라고까지는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존사관을 내세우면 ‘국뽕’이니 쇼비니즘이니 유사사학이니 뭐니 하는 비학문적 막말로 상대방을 윽박지르면서 스스로는 학문적으로 고귀하고 의연한 학자인 체하는 위선적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이웃 나라의 자존적 역사관에 비추어 볼 때 분명 타기할 주객 전도의 현상이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러시아의 역사가로 ??고조선연구??를 쓴 부틴(Yuri Butin)이 지적한 대로 “다른 나라 역사가들은 자국 역사를 높이기 위해 없는 역사도 만들어 넣는데 왜 한국 역사가들은 있는 역사도 그것이 자국에 유리하면 믿을 수 없다, 위서이네 하면서 폄훼하
고 깎아내리려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요컨대, 역사서는 후세에게 자기역사에 대한 자학적 열패감을 조장하는 기록으로 작동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자긍심을 고취하라는 의미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그것이 거짓이 아닌 이상 결코 값싼 ‘국뽕’ 운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국의 역사서가 취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기??의 기록을 한 대목 살펴보자. 사마천은 한무제의 명을 받은 양복과 순체 두 장군이 B.C. 108년 5만 군사를 거느리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기록을 기술한다. 그러나 한무제는 이 두 개선장군을 대대적으로 포상하기는커녕 순체는 거시형이란 참형을, 양복에게는 참혹한 궁형을 내리는 기록이 나오는데, 사마천은 다른 것과 달리 이 대목에서 그 이유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했는데, ??환단고기??의 북부여기에는 그 분명한 이유가 나온다. 즉, 양복과 순체는 내친김에 요동으로 진격하여 고조선의 북부여를 완전 정복코자 했으나, 북부여의 왕족 고두막한(후에 졸본부여의 동명왕이되어 결국 북부여의 단군이 됨)이 의병을 일으켜, 그 진격을 저지시키고 한무제 군대를 패주케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 하나로써, 한무제가 왜 두 장군에게 포상 아닌 가혹한 징벌을 내렸는가에 대한 해답과 함께, 한사군이 위만조선의 위치인 험독성지역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은 몰라도 양복과 순체가 패주하여 퇴각한 요서지방에서 수천 킬로 떨어진 한반도의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애시당초 성립 불가한 허구의 역사 왜곡으로밖에 볼 수 없다 할 것이다.
이는 바로 중국이 보인 위국휘치(爲國諱恥)에 의한 자국역사 기록의 한 가지 전형이다. 반면에, 우리 역사기록은 자기비하(自己卑下) 내지 자학사관에 의해 이런 고두막한 장군에 의한 위대한 승리의 기록조차 ??환단고기??는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감추어 버린다. 그 후 우리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의 결과를 보면 올바른 역사관의 확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고대사에 관한 자료의 빈곤을 한탄하지만 이러한 ??환단고기??가 기록한 고두막한의 존재 하나만 하더라도 진작 부각 되었던들 현재 중국이 내세우는 동북공정과 한사군 평양설이 설 땅이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 역사의 융성은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서 보인 위국휘치(爲國諱恥)와 존화양이의 자존사관이 후세에 한사군에 의한 한반도 북부 지배하는 역사 왜곡이 사실인양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온 반면에, 우리나라는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통렬히 지적한 바와 같이 고려 중엽 이래 ??삼국사기??에서 보인 자비사관에 순치되어 그 결과 우리나라 역사는 점차 축소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필자의 본 저서 ??열도총독-왜 5왕의 실체??는 바로 이런 역사관을 불식하고 왜곡된 고대 한일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한 필자 나름의 제1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원래 필자의 학위논문 ?왜5왕과 왜왕제도에 관한 연구?(순천향대학원, 2024)를 일반인이 읽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여기
에는 5세기를 관통하여 일본 열도를 지배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의 실체가 어찌하여 한국 학자들의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어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일본의 관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그저 일왕의 다른 이름으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이는 필자가 무슨 심오한 연구를 통해 밝혀낸 역사 진실이라기보다, 앞에서 언급한 자주적·자존적 역사관의 시각에서, ??일본서기??나 ??삼국유사??에서 외면한 ??송서??의 상표문 기록과 일제가 삭제한 광개토태왕 비문 경자년조(400)의 기록을 토대로 밝혀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자가 우리 강단사학계에서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없이 위서로 몰아붙이는 ??환단고기??의 기록과, ??환단고기??의 편저자 운초 계연수 선생의 광개토태왕 경자년조(400)에 대한 ?무술등본?을 과감히 인용했음도 특기할 만한 대목일 터이다.
??환단고기??나 ?무술등본?의 진실과 역사성은 바로 이 논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 존재의 가치가 확실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을 통해 5세기 전후 300여 년간 일본 열도는 660년 백제가 망할 때까지 40여 년간의 고구려지배를 제외하고 백제의 지배하에 있었고 왜5왕은 바로 본국인 고구려 백제가 각각 파견한 열도 경영의 총독이자 본국 왕위 후계를 위한 훈련 코스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할 것이다.
따라서 학계가 이 논문이 운초 계연수 선생의 무술 등본을 근거로 밝혀낸 광개토대왕 비문상 경자년조(A.D. 400년) 열도 상
륙의 진실성이나 ??송서??에 나타난 문언을 근거로 왜왕 제(濟)가 백제 근초고왕과 동일인이며 왜왕 무(武)가 왜왕 제(濟), 즉 근초고왕의 아들로 후에 백제 무령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무령왕릉의 묘지석이 거짓이라고 반증할 결정적 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간 논란이 되어온 ??환단고기??의 위서론이나 4세기 신공왕후의 삼한 정벌주장과 임나일본부설은 애초 성립이 불가한 허구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증명된다.
학문은 ‘학문의 자유’가 생명이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통해 어렵게 밝힌 내용을 아무런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토론 절차도 거치지 않고, “통설에 반한다”, “믿을 수 없다”, “위서이다”라는 식으로 덮어씌움으로써 자유로운 연구 자체를 봉쇄하는 주류 역사학계의 횡포가 어떻게 우리 역사학을 황폐화시켰는지 그 현장을 직접 절실히 느끼시리라 확신한다.
모름지기 이 작은 책자를 통해 그러한 병폐가 조금이라도 불식되고 묻혔던 우리 역사의 진실이 새로이 바르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으로 본 책자가 나오기까지 필자의 학위논문 ?왜5왕과 왜왕제도에 관한 연구?를 지도해 주신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교수님과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님, 순천향대 이영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왜왕 무(武)와 백제의 무령왕이 동일 인물임을 진작에 밝혀주심으로써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주신 소진철 원광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소진철 교수님의 건강이 하루 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또 이 책의 윤문에 도움을 주신 한성례 교수님 그리고 기
꺼이 출판을 맡아 힘써준 박영사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만학도 남편과 아비에게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아내 김춘강과 아들 경구 내외, 딸 유경, 채경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러한 온 가족들의 전폭적인 격려와 성원이 없었던들 본 연구는 물론 역사 주권재단의 출범 자체가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5년 12월
선정릉의 푸른 숲이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에서
이오(夷悟) 김주인(金周仁)
김주인(재단법인 역사주권 이사장)
1943년생 경북 안동 출신,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1970년 ㈜ 시즈 통상을 창업하여, 수출보국의 일념으로 53년간 기업경영에 몰두하다 은퇴를 즈음하여 역사 연구에 발을 들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2024년 81세의 늦은 나이에 순천향대학에서 「왜 5왕과 왜왕제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은 그간 수수께끼로 여겨졌던 왜5왕의 실체를 새로운 접근으로 밝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는 12년간 성남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분당 서울대학병원 후원회장과 카이스트 AIM 총동창회장을 거쳤다. 2023년에는 중소기업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현재 재단법인 역사주권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서 다양한 역사 활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순국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 기념사업회와 운초 계연수 선생 선양회의 상임고문으로 관여하고 있다.
차례
제1장 서론
제1절 배경과 목적 4
제2절 기존 연구사와 그 문제점 11
제3절 연구 범위와 방법 30
제2장 왜왕 제도의 성립과 성격, 발전과정
제1절 왜왕 제도의 성립 40
제2절 왜왕 제도의 성격 55
제3절 왜왕 제도의 발전 67
제3장 광개토대왕릉 비문의 경자년조 징실
제1절 경자년조와 왜왕 찬·진의 등장 108
제2절 잔존 어휘 분석 113
제3절 「무술등본」으로 보는 경자년조 128
제4절 신묘년조의 재해석 155
제4장 왜5왕의 실체
제1절 왜5왕 실체의 역사적 중요성 176
제2절 왜왕 찬·진의 실체 179
제3절 개로왕과 곤지 그리고 사마 186
제4절 왜왕 무의 「상표문」 분석 191
제5절 왜왕 제·흥·무의 실체 200
제6절 무령왕과 게이타이 217
제7절 거대고분군 문제 223
제5장 결론
참고문헌 246
색인 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