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 11. 04
머리말
나는 덕유산 자락의 시골 마을에서 나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도 자애로운 사랑을 받고 초등학교를 다녔다. 도청 소재지가 있는 큰 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외롭고 고향집 생각이 하루도 떠나지 않는 나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좀 일찍 끝나는 날에는, 나는 하숙집 가까이에 있는 도립도서관에 달려가서 문학전집에서부터 대중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우리집 생각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의 4대 기서라 하는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그리고 〈삼국지〉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서유기〉는 허황된 상상의 이야기이고, 〈수호지〉는 양산박 의적들의 이야기로 매우 흥미진진하였다. 〈금병매〉도 있을 법한 인간의 이야기였지만, 〈삼국지〉에는 충의의 교훈이 있고 삶의 지혜가 담겨 있어 그 읽는 재미는 단연 으뜸이라 여겨졌다. 한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놓지 않게 되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마력이 있었다.
나는 그때 여러 종류의 〈삼국지〉를 거의 다 읽었는데, 특히 그중에서 1954년에 정음사가 펴낸 전 10권으로 된 〈삼국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당시 책자에는 번역 및 발행인이 최영해로 되어 있었는데, 그 후 오래 지나서야 원 번역자가 구보 박태원이었고 약 반 정도 번역한 상태에서 그가 월북하여, 최영해 발행인이 그 문체로 마무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 번역의 문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이를 읽느라고 하숙방에서 밤을 지새우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건대, 도서관에서 〈삼국지〉를 대출받아 대나무 숲 벤치에서 깊이 탐독하고 있을 때 바람이 불어 대나무 잎이 흔들렸다. 바로 이때, ‘역사는 흐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때, 가정 형편으로 일 년 휴학하게 되어 나는 조부님의 말씀을 따라 1년 동안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게 되었다. 거기서 강지江贄의 〈통감절요〉를 배웠는데 권20에서 권26까지가 삼국시대 역사였고 앞서의 중학교 때 읽은 〈삼국지〉는 기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라고 불리는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대학 1, 2학년 때, 대학, 중용, 논어, 맹자와 시경 교과목을 이수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문 원전에 가까워졌고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탐독하게 되었다. 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그 후 교수로 재임할 당시에는 전공 분야인 사회과학 영역의 연구와 강의로 하루하루가 채워지면서, 〈삼국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1992년 우연히 몇몇 교수들과 관악산 등산을 하면서 〈삼국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삼국지를 사랑하는 교수들의 모임’으로 이어졌고, 동호인들의 상당한 호응 가운데 춘하추동으로 정례적인 ‘삼국지 세미나’가 20여 년간 진행되었다. 나는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나 스스로 〈삼국지 배송지裴松之 주〉와 범엽范曄의 〈후한서 본기〉, 그중에 〈삼국지〉 인물과 겹쳐지게 입전된 〈후한서 열전〉 13명의 인물을 깊이 탐독하게 되었다. 이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 권55 제1차 당고의 화에서 권81 진晉나라의 천하통일까지, 그리고 방현령房玄齡 〈진서〉의 선제기, 두예전, 왕준전을 깊이 있게 파고들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도서관 대나무 숲에서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을 때 떠올랐던 ‘역사는 흐른다’는 문제의식에서 이제는 역사 〈삼국지〉를 통해 1,800년 전 약 1세기에 걸친 긴 전란의 ‘삼국시대를 이끌어가는 추동력은 무엇인가’라는 테제에 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찍이 〈삼국지〉의 삼국시대 제갈량諸葛亮은 융중대에서 “조조를 원소와 비교해 보면, 명성은 희미하고 병력은 적었지만 마침내 조조가 원소를 무찌르고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오로지 천시天時 때문만이 아니라 인모人謀에 의지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역사를 이끌어 가는 추동력은 인간의 의지 작용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택동毛澤東은 그의 〈지구전을 논함〉에서 “의식적 능동성은 인간 특유의 특성이다. 이 특성은 전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분명히 승패는 전쟁을 수행하는 쌍방의 고유한 일련의 조건들 전체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 조건들은 승패의 가능성을 결정할 뿐이며, 승패에 대한 결정을 초래하는 데에는 전쟁에서의 의식적 능동성이 필요하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 변동의 패러다임에서 후한 왕조가 무너지고, 〈삼국지〉의 삼국시대 약 100년 동안 격동하는 난세에 접어들면서 군웅할거시대를 거쳐 마침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정립으로 압축되고, 그 세 나라는 각기 주군과 모신, 무장들의 ‘의지와 계책’이라는 추동력을 다해 천하통일을 향한 쟁패를 펼쳐나간다. 파란만장하게 역사에 수놓아진 이 인물들의 역사 대서사시를 본서 〈삼국지 인물론〉 연작물에서 한 올 한 올 풀어 펼쳐나가려고 한다.
모택동은 〈심원춘 장사〉에서 “아, 광대무변하여라 / 묻노라 이 창망한 대지 위 / 인간의 모든 운명 주재하는 자 그 누구이던가”라며 역사의 추동력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에 대해 〈심원춘 설〉에서 “모두가 흘러가 버린 일 / 정녕 영걸을 찾으려거든 /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고 화답하고 있다.
〈삼국지〉의 삼국시대라고 하는 그 옛날古의 역사 추동력의 주술을 풀어낼 마법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오늘날今이다. 나는 〈삼국지〉 텍스트의 역사 인식에서 진실로 고금의 만남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하며, 이 같은 지평이 본서의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울림으로라도 다가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2008년 3월 봄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서울시민대학에서 〈삼국지와 삶의 세계〉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삼국지 인물론〉 저술을 구상하게 되었다. 큰 설렘과 또한 두려움이 함께 하였다. 높은 산에 등산해 본 경험도 없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려는 계획으로 등산용품 가게에서 서성이는 심정이었다. 그동안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삼국지〉의 세계에 흠뻑 빠져 거의 8여 년이 된 2017년에 〈삼국지 인물론〉의 프롤로그라 할 〈삼국지 군웅할거 인물론〉을 출간한 바 있다. 〈삼국지〉 마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삼국지〉 수준을 업그레이드했다는 격려도 받았으나 〈삼국지〉 인물들의 성격 분석을 다원적 프리즘으로 시도하다 보니 사료가 중복되는 등 첫 작품으로 미흡함도 적지 않았다. 그 후 또 만 8년이 지나 이제 〈삼국지 인물론〉의 본령이라고 할, 삼국정립의 양 대척점에 서있는 위魏와 촉蜀의 〈삼국지 조조 천하 꿈 펼친 모신 무장들〉과 〈삼국지 유비 한실 꿈 펼친 모신 무장들〉 등 두 권을 동시에 상재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2008년 3월 〈삼국지 인물론〉 저술 구상 후, 〈삼국지〉의 세계에 미쳐 있었으나 해찰을 많이 하는 등 저자의 미흡함이 적지 않았는데, 이번에 상재하는 두 책자는 〈삼국지 인물론〉의 본령을 다루게 됨에 저자 나름대로는 쓰고 싶은 대로 힘껏 썼다는 속내를 표하면서 동학제현의 관심과 많은 질정을 바라는 바다.
오랜 집필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게 꾸준히 힘이 되어 격려해 주신 선배, 친우, 후배님께 먼저 깊은 감사와, 아울러 〈삼국지와 삶의 세계〉 강좌에 참여하시며 세월을 함께 하신 회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원고 정리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본서의 출간을 기꺼이 맡아준 박영사 기획?마케팅, 편집 담당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2025년 10월
고금재古今齋에서
저자 한 형 수
저자 소개
한형수(韓亨洙)
아호: 고금(古今)
- 전북 장수 출생
-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전임강사
-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교무처장, 도시과학대학 학장, 도시과학대학원 원장, 세무전문대학원 원장
-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회장, 한국노년학회 회장
- 보건복지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
- 서울특별시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 1992년부터 《삼국지를 사랑하는 교수들의 모임》의 삼국지 세미나 20여 년간 주도적 참여.
• 2015년 중국어문연구회·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주최
기획주제 《삼국지연의 과거·현재·미래》 학술대회에서 “삼국지에 나타난 인물 관우의 성격” 논문 발표.
• “삼국지에 나타난 인물 관우의 성격” 《중국학 논총》 제49집 논문 게재.
• 저서: 《삼국지 군웅할거 인물론》, 홍문관, 2017.
목차
제1장
난세를 추동하는 인물들 삼국정립 펼치다 / 11
1. 《삼국지》의 주군과 모신 무장들의 사상 가치성향 _18
2. 《삼국지》의 주군과 모신 무장들의 성격유형 _38
3. 《삼국지》의 촉蜀형세 한실 꿈 펼친 주군과 모신 무장들 _64
제2장
사람을 품어 난세를 헤쳐 나간 능굴 능신의 영웅 유비 / 71
1. 인물 유비의 삶의 궤적 _73
2. 명분과 인의를 바탕으로 시대를 헤쳐나간 인걸 _93
3. 관용과 성심의 성격으로 중망을 얻었던 주군 _108
4. 주군 유비의 남은 논의 _147
제3장
세상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출장입상의 명전략가 제갈량 / 157
1. 인물 제갈량의 삶의 궤적 _159
2. 한조부흥에 헌신한 충의지사이자 고금의 명재상 _184
3. 신념과 냉철한 성격으로 공평 공개 공정의 뛰어난 정치가 _198
4. 모신 제갈량의 남은 논의 _239
제4장
익주공략을 추동하다 꺾이고 만 비운의 지략가 방통 / 249
1. 인물 방통의 삶의 궤적 _251
2. 과단성과 융통성을 함께 지닌 도가적 기품의 재사 _257
3. 타인의 잠재력을 발현시킨 창조적 성격의 현사 _264
4. 모신 방통의 남은 논의 _283
제5장
일의 성패 예견능력 지녀 익주 병탄 한중전쟁에 공헌한 책사 법정 / 289
1. 인물 법정의 삶의 궤적 _291
2. 패업 추구에 진취적인 면모를 보인 꾀주머니 _298
3. 기민한 성격으로 뛰어난 상황 판단력을 보인 모사 _306
4. 모신 법정의 남은 논의 _326
제6장
홀로 말에 올라 천 리 길을 간 충의와 무략의 관우 / 329
1. 인물 관우의 삶의 궤적 _331
2. 충의와 용맹의 기상을 드높인 만고의 의절 _343
3. 강한 신념의 성격이 경외와 패착을 불러온 일세의 무신 _352
4. 무장 관우의 남은 논의 _377
제7장
당양 장판파의 대갈일성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용략의 장비 / 383
1. 인물 장비의 삶의 궤적 _385
2. 충용의 기상이 넘치는 호탕한 풍도의 임협 _392
3. 독선적인 성격으로 비운을 불러온 당대의 용장 _398
4. 무장 장비의 남은 논의 _420
제8장
아두 품고 적 대군을 돌파한 위기 관리의 장수 조운 / 425
1. 인물 조운의 삶의 궤적 _427
2. 문무겸전과 선공후사의 유장 _434
3. 원리 원칙의 성격이면서도 기동타격에 능한 숙장 _440
4. 무장 조운의 남은 논의 _461
제9장
양의와 후계 다투다가 반기를 든 것이 된 숙장 위연 / 465
1. 인물 위연의 삶의 궤적 _467
2. 끝내 반골의 낙인을 벗어나지 못한 비운의 무인 _474
3.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스스로를 펼치지 못한 외로운 무골 _478
4. 무장 위연의 남은 논의 _495
제10장
북벌에 일로매진 촉의 명망 잡지 못한 최후 주자 강유 / 499
1. 인물 강유의 삶의 궤적 _501
2. 중원 회복을 위해 북벌을 멈추지 않은 독불장군 _508
3. 강박적 성격으로 북벌에 매진했던 촉 최후의 일인 _516
4. 모신 강유의 남은 논의 _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