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10.30
첫 번째 이야기: 여는 글
양현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 책은 정년 기념으로 서울대 법학연구소가 출간지원을 해 주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여, 여는 글에서는 저의 교수 생활에 관하여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저는 2003년 서울대 법대에 최초 여성 교수라는 표식을 달고 임용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존재치 않았던 법여성학 분야의 신임 교수이자 사회학 전공자라는 점도 덧붙여지면서 꽤 주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초기에 법여성학이라고 불렸던 과목명은 여성과 남성, 그리고 성소수자 모두를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이후 젠더법학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법체계와 법적 사건 그리고 법현상을 젠더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분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현재는 젠더법학을 중심 명칭으로 하여 페미니즘 법학과 혼용되고 있습니다.
법대에의 임용은 매우 영예로운 일이었지만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법학 전공자가 아닌데다 저 자신도 체계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 ‘여성주의 법학(feminist jurisprudence)’을 강의해야 했으니까요. 유학 중에 수강했던 강의에서는 페미니스트 법학교수가 자신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강의를 구성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미국 유학 중에 법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예일대 로스쿨에서 청강하게 된 데서 시작합니다. 강의에서는 판례를 중심으로 하여 관련법과 사회 변화, 다양한 사회 인식론을 거침없이 토의하였는데,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그리고 역사적인 차원들이 서로 똬리를 틀고 얽혀있는 사안을 법의 논리로 해결해 가는 과정은 참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이후 한국가족법으로 박사논문을 쓰게 된 것은 이러한 경험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가족법에 대한 여성주의 법과 사회 접근으로 논문을
쓰면서 많은 자료들을 보았지만 해석의 빈자리(lacuna) 역시 많아서 어떻게 집필해야 할지 어려움이 정말 많았습니다. 면벽수행을 하듯이 벽에다 수십 개의 메모로 풀리지 않던 질문들을 써 놓고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쳐다보면서 답을 구했지요. 말할 것도 없이 가족법, 사회학, 역사학 연구자들의 앞선 연구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였고 ‘어머니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가족법의 어떤 규정이나 태도가 앞선 어머니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하는 ‘한국의 여성주의 법학’ 연구를 하고 있었지요. 좀 더 정확하게는, 가족법 텍스트와 가족법이 만들어 냈던 사회공간 속에서 ‘여성들은 어디에 있었나’라는 질문으로 그녀들의 위치에서 가족법을 다시 읽는 접근을 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돌아가셨던 내 어머니, 그리고 많은 어머니들에게 어떻게 가족의 삶을 살아냈는지, 아프고 서러웠을 경험들을, 하지만 사랑과 용기로 넘어섰을 그 삶을 상상하며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렇게선배들이 주신 연구와 어머니들이 주신 영감의 덕으로 벽에 붙였던 질문들이 하나둘씩 아니 거의 다 떼어졌을 무렵, 저의 논문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한국의 여성주의 법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성주의 법학을 찾는 여정이었지요.
너무 거창하게 표현하였나요? 어쩌면 모든 학문연구는 이렇게 있는 것을 소개하면서도 그것을 찾는 중에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신생 분야로서 젠더법학 담당 교수로서 저는 임용 첫 해인 2003년에 한국 법여성학에 관한 학술대회(앞의 ‘수제’ 포스터 참조. 이후 『가지 않은 길, 법여성학을 향하여』, 사람생각, 2004)를 조직하였고, 다음 해 2004년에는 ‘낙태죄에서 재생산권으로’(이후 동제목으로 사람생각, 2005)를 기획하였고, 2005년에는 한국젠더법학연구회를 창립하는 등 숨 가쁘게 달려온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이 과정에서 제가 썼던 글과 그때의 이야기, 그리고 시각 자료들이 시계열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딱딱한 학술논문이 아니라 이야기들 속에서 제 글을 바라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있는 학술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책이 내러티브들을 엮은 하나의 조각보와 같다면 이 이야기들에 관통하는 몇 가지 특성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것은 먼저 사회적 맥락 속에 놓여 있던 연구라는 점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사회에는 가족법상의 제도이자 한국가족의 조직이자 인식 방식인 호주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어요. 실은, 이태영 변호사가 활동을 시작하신 1950년대 초부터 호주제 폐지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수차례 한국가족법이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림과 우리정부는 호주제도가 ‘한국의 미풍양속’이라고 하면서 개정을 막아섰지요. 1990년대가 되면서는 한국가족의 소규모화, 이혼, 재혼, 국제혼인 등의 증가로 호주제도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고 시민들의 호주제 폐지에의 요청은 들불과도 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호주제의 여성 차별성과 식민지성에 대해 발표하고 다녔습니다. 호주제도는 미덕을 가진, 진정한 전통이 아니라 식민지 정부하에서 재구성된, 성차별적인 식민지 유산이라는 것이지요. 2005년 2월 헌법재판소는 호주제도에 대한 위헌제청을 받아들여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였고 3월 국회에서는 호주제를 전면 삭제한 민법 개정안을 의결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미국 유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위안부’ 이슈 역시 평생동안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특히 2000년 12월에 개최되었던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은 이후 저의 위안부연구의 모든 씨앗이 담겨 있었다 할 정도로 커다란 경험이었습니다. 이후 일본군 성노예제문제의 진실규명과 역사정의 실현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8월 현재까지도 진실에 바탕한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정치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저의 ‘위안부’연구와 생각이 성장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개개인 서브알턴(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한국 혹은 세계의 시민들이 그 피해와 생존의 힘을 기억하게 되었고, 한국사회의 내부적 해방을 꿈꾸게 된 것은 크나큰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연결되는 것으로, 저의 젠더법학연구는 집합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앞서 언급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의 증언연구를 위해 조직한 증언팀은 피해자 중심적 증언의 연구와 재현 방법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론은 공동작업의 결과입니다. 또 서울대 법대에 임용된 다음 시작한 대학원 학생들과의 ‘재생산권리(reproductive rights) 세미나’도 공동연구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이후 이야기에서 나올 것처럼 저는 한국의 형법상 낙태죄 규정에 대해 수상하게 여기고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재생산권리라는 국제규범으로 굳건히 자리잡힌 인권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낙태죄에 대한 헌법소원들 (2012년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과 2019년 헌법재판소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짐) 역시 집합적 노력의 장이었습니다. 이 헌법소원을 위해서 변호사, 의사 등의 많은 노력이 있었고 그 근간에는 혜화역 등지에서 낙태죄 폐지를 외쳤던 여성시민운동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저의 연구들은 많은 사람들의 교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제 강의를 수강했던 학생들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학생이 제출했던 글이나 질문을 보면 신선한 발상이 매우 많았기에 그들이 오래된 영혼임을 알았습니다. 이것들을 다시 곱씹는 과정에서 저의 생각이 다듬어지고 형성되고 힘을 받아 온 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학생들에게 준 가르침이라는 것이 다시 저에게 가르침이 되어서 마이너 분야인 젠더법학과 법사회학의 내용과 감각으로 쌓여 왔던 것이지요. 이 점에서 이 자리를 빌려 지난 20여 년간 제 강의를 수강했던 많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젠더법학은 함께 만들어온 지식의 장(場)이었다고요.
마지막으로 이 책은 서울대 법대라는 젠더법학의 미답의 영역에
사회학 전공자인 제가 ‘낙하하면서’ 시작된 일종의 기행기 혹은 모험기가 아닌가 합니다. 법과대학과 법학전문대학원이라는 공간에서 넉넉한 지원이 있었고,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라는 든든한 활동의 아지트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아가 한국젠더법학회와 같은 동지들이 모인 학회 역시 중요한 사유의 터전이 되어 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실린 병역법 제3조 제1항(남성 징병제), 간통죄, 일본군 성노예제에서 자행된 성폭력에 대한 식민주의적 해석 등은 모두 같이 그러나 혼자서 좌충우돌하였던 기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로서 다소는 자유롭고 사회구조적인 사색을 하면서도, 법의 기존 문법 속에서 길을 찾고 또 헤매던 저의 모험의 흔적이 담겨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학제적 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늘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들에서 나름 찾았던 논리들이 우리의 사법부와 법학, 그리고 사회 속에 조금이나마 스며들기를 바라 봅니다. 역시 모험가다운 바람이지요!
끝으로 무사히 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수많은 분들과 영혼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지원해 주신 서울대 법학연구소와 박영사 출판사에, 기꺼이 섬세한 편집을 맡아주신 장유나 차장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서울대 교수 생활을 지켜보면서 같이 울고 웃어준 가족들에게 다시 눈물로 감사드립니다.
2025, 여름이 물러간다는 처서에 저자 드림
저자소개
양현아(梁鉉娥)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소속되어 서울대에서 젠더법학과 법사회학을 강의하였고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의 겸임교수로도 참여하였다. 2025년에 정년을 맞이하여 명예교수가 되었다. 사회학 박사로 서울대 법대 최초 여성 교수로, 최초 젠더법학 교수로 임용되어 젠더법학의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였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이론을 구성하려는 뜻을 한결같이 품었고 사회학, 젠더연구, 법학 간의 학제적 연구를 시도해 왔다. 저서로는한국가족법 읽기-전통, 식민지성, 젠더의 교차로에서, 창비출판(2011)이 있고, 편저로는 가지 않은 길, 법여성학을 향하여, 사람생각(2004). 재생산권리 I: 낙태죄에서 재생산권으로, 경인문화사(2005), Law and Society in Korea, Edgar Elgar Publisher (2013), 재생산권리 III: 성⋅재생산권 실현을 위한 법정책의 제안, 경인문화사(2024) 등이 있고, 공동연구로는 강제로 끌려간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 풀빛(2001)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평등, 차이, 정의를 그리다 - 페미니즘 법이론』(공역), 서울대 출판문화원(2019)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Medvlla Iurisprudentiae
“Medvlla Iurisprudentiae”는 ‘법의 정수精髓․진수眞髓’라는 뜻으로,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정년퇴임하시는 교수님들의 논문을 모아 간행하는 총서입니다.
법학 교육과 연구를 위해 일생을 보내고 정년퇴임하는 교수님들의 수많은 연구업적들 중 학문적으로 가장 가치있는 논문만을 엄선하여 간행하였습니다.
이 총서가 법학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후학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차
첫 번째 이야기: 여는 글
CHAPTER 01
호주제도의 젠더 정치: 젠더 생산을 중심으로
Ⅰ. 문제제기
Ⅱ. 이론적 배경
Ⅲ. 호주제도의 젠더 논리
Ⅳ. 요약 및 결론
CHAPTER 02
범죄에서 권리로: 여성의 낙태권리의 필요성과 그 함의
Ⅰ. 문제제기
Ⅱ. 여성주의 법학이 구성한 낙태권리
Ⅲ. 사회 시스템 속에서 본 한국 여성의 낙태
Ⅳ. 재생산권리의 이해
Ⅴ. 맺음말
CHAPTER 03
사회학적 사고와 법해석의 교감(交感)을 위해
Ⅰ. 열며
Ⅱ. 사실확정의 문제
Ⅲ. 언어체계로서의 법
Ⅳ. 사회구조/맥락과 인간행위
Ⅴ. 맺음말: 한계 상황 앞에 놓인 법
두 번째 이야기: 한국젠더법학연구회 창립
CHAPTER 04
병역법 제3조 제1항 등에 관한 헌법소원을 통해 본 남성만의 징병제도
Ⅰ. 여는 말
Ⅱ. 헌법소원의 사건 내용
Ⅲ. 본 사건에 대한 의견 및 미국의 로스커(Rostker) 사건 판결
Ⅳ. 여성의 징집 면제는 ‘수혜적 차별’인가?
Ⅴ. 여성의 차이론
Ⅵ. “최적의 전투력”과 “충분한 인력”론
Ⅶ. 맺음말
CHAPTER 05
포스트 간통죄 폐지: 드러난 성적 자기결정권 담론과 묻혀진
피해배우자의 손해
Ⅰ. 여는 말
Ⅱ. 법과 사회의 측면에서 본 간통죄
Ⅲ. ‘이행기’ 젠더 정의
Ⅳ. 맺음말
세 번째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 연구
CHAPTER 06
2015년 한일외교장관의 ‘위안부’문제 합의에서 피해자는 어디에 있(었)나?
Ⅰ. 여는 말
Ⅱ. 일본군 ‘위안부’운동과 피해자의 위치
Ⅲ. 피해자권리에 관한 국제규범과 ‘2015 합의’
Ⅳ. 다시 “피해자는 누구인가”
Ⅴ. 맺음말: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피해 회복을 위하여
네 번째 이야기: 여성연구소와 “서여리강”
다섯 번째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 증언
CHAPTER 07
“Now Halmŏi (Grandmother) Talks to Us in English”: Method of Translation and Its Significance
여섯 번째 이야기: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CHAPTER 08
한국의 재생산정책 수립에서 미혼모/미혼여성의 재생산권리의 중요성
Ⅰ. 여는 말
Ⅱ. ‘미혼모’의 성과 재생산권리
Ⅲ. 미혼모들의 사회적 현실에 다가갈 수 있나
Ⅳ. 미혼모정책: 복지에서 “수용”의 정책으로
Ⅴ. 맺음말
일곱 번째 이야기: “소수자들의 강력한 목소리”
CHAPTER 09
“Significance of the Subaltern Voi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