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09.01
중추신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고 일상에서 그 존재가 인식되는 일도 드물지만 신체의 감각?운동?생체기능 등을 조절하고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형사절차법에서는 소송행위의 가치판단 문제가 그에 대응한다.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고 자주 쟁점화되지 않을 뿐 사실은 형사소송의 모든 국면이 이와 연결된다. 증거능력이나 기판력 등 쟁점이 근육과 피부에 생기는 이상이라면, 소송행위의 가치판단에 관한 쟁점은 중추적 조절기능의 이상에 해당한다. 하자치유 문제는 그중에서도 중핵을 이루는 것으로서 형사소송이론의 정교함 정도 및 형사사법실무의 정형화 정도와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무효인 소송행위의 하자치유 여부는 단순 기술적?합목적적 판단을 넘어 형사소송법의 목적과 기본원칙들 간 우선순위와 비중에 대한 평가를 요하는 논제다.
그럼에도 이에 관해 학계와 실무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다.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공소제기, 공소장변경, 증인신문 등 다양한 소송행위에 관해 (특히 책문권포기를 이유로) 하자치유를 인정해 왔으나 상세한 기준이나 요건을 제시하기보다는 다툼이 있을 때마다 그 쟁점에 대한 간략한 결론만을 내놓고 있다. 개론서들은 하자치유 문제를 비롯한 소송행위의 가치판단에 관한 총론적 내용을 도입부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그 분량은 대체로 열 페이지를 넘지 않으며, 각론적 쟁점과의 연계는 거의(사실상 전혀)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형사절차법 이론은 중추신경계 질환으로 인한 병변을 단순한 피로감이나 감각 이상으로 치부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지 않는 의료행위처럼, 소송행위의 하자치유 문제를 개개 사안에서의 산발적?국소적 현상으로 취급해 주변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판례상 하자치유 인정 여부가 문제된 소송행위들은 공통요소를 추출해 내기 어려울 만큼 종류가 다양하고, 그 하자의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이 점은 하자사안에 두루 적용될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일을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작업처럼 비치게 만든다. 그러나 하자치유 가부 및 기준에 관한 개략적 틀을 짜는 것은 가능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필요하다. 이는 효력규정의 규범력을 언제 어떻게 또 얼마만큼 포기할지의 문제로서 개별사안에서 종국판결의 내용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에, 피고인과 검사 모두에게 중차대한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하자사안에서의 법적 결정에 고려되는 사정은 사건마다 다르므로 일의적 해결은 불가능하나, 최소한 법원이 어떤 법규범에 기대어 결정해야 하는지, 나아가 그 규범의 내용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관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터잡아, 이 책에서는 형사재판에서 하자의 치유에 관한 통일적?체계적인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고 이를 구체적 쟁점에 적용해, 소송행위가 무효인 사안에서 수소법원이 취해야 할 적절한 소송법적 조치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방법론적으로 그 작업은, i) 법체계에는 법규칙(legal rule)뿐 아니라 그와 논리적으로 구별되는 법원리(legal principle)도 포함돼 있고, ii)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hard case)에서의 법적용은 법원리 간 형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반면, iii) 법규칙이 존재하는 사안에서는 그러한 형량이 불요부당하다는 인식에 기초해, 하자사안을 원리충돌사안과 규칙적용사안으로 분별하여 고찰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무효와 불성립의 구별, 형사소송의 목적과 진실개념, 형사소송구조론, 유추금지원칙, 심급의 이익 등 다양한 이론적 주제들과의 연계를 시도했다. 저자는 종래 몇 편의 글과 박사학위논문(형사재판에서 소송행위의 무효와 하자의 치유, 2025)에서 이러한 작업을 한 바 있으며, 이 책은 바로 그 논문을 출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문장과 참고문헌을 다시 한번 정리하였고, 내용은 (약간 첨삭을 가하였으나) 대부분 학위논문의 그것과 일치한다.
비록 책의 중심주제가 하자치유 문제에 맞춰져 있기는 하나, 더 나아가 소송행위의 가치판단 전반에 관한 이론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서술하였고, 그 밖에 형사소송법의 다양한 쟁점들을 포괄하여 다루고자 하였다. 소송행위의 가치판단 문제는 수사절차에서 상소, 나아가 비상구제절차까지 형사절차의 전 영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간행 하급심판례를 최대한 많이 소개하는 한편, 실무가로서 필자의 경험이나 관점도 일부 덧붙임으로써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염두에 두었다.
형식상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몇 년간 단행논문에서 주장한 바를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변종필 선생님의 저서[『법철학강의』, 박영사(2022), 『형사소송의 진실개념』, 세종출판사(1999) 등] 및 논문에서 제시된 견해나 방법론을 소송행위의 가치판단 문제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의 부족함으로 인해 혹여 선생님의 서술을 오독하거나 왜곡시킨 부분이 있을까 저어되기도 하나, 무효와 하자치유에 관한 이론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와 실무가들을 위해 저자의 관점을 부족하나마 공유하고자 출간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 책이 소송절차론의 연구와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소망한다.
2025년 9월 1일
나 기 업
나기업(羅基業)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변호사시험 6회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
저서《형사소송법》(공저)
논문<형사소송에서 의사표시의 하자>, <공수처 검사의 수사범위와 영장청구권>, <공소장일본주의 위반과 공소사실불특정의 소송법상 효과>, <제1심의 소송행위가 모두 무효인 경우 항소법원의 조치>, <형사소송에서 하자의 치유와 책문권포기>, <공소제기의 무효>, <5․18에 대한 허위사실유포죄를 둘러싼 2가지 쟁점>, <효력을 상실한 비약상고의 항소간주>, <직접주의와 공판중심주의․전문법칙의 관계>, <약식절차를 둘러싼 몇 가지 쟁점>, <형사절차에서 검증, 감정 및 ‘필요한 처분’의 개념>,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확정과 불일치의 문제> 外
제1장 서 론
제1절 하자치유의 기준을 찾아서 3
제2절 비실증주의적 접근 7
제2장 하자치유의 전제
제1절 소송행위의 무효 11
제2절 무효와 부존재의 구별 52
제3절 요 약 64
제3장 하자치유의 기준
제1절 하자치유 문제의 규범적 성격 69
제2절 원리충돌사안 77
제3절 규칙적용사안 111
제4절 요 약 117
제4장 하자사안에서 법원의 조치
제1절 하자가 치유된 사안에서의 조치 121
제2절 하자가 치유되지 않는 사안에서의 조치 125
제3절 요 약 131
제5장 적 용
제1절 원리충돌사안 135
제2절 규칙적용사안 149
제3절 요 약 175
제6장 결 론
사항색인 185
참고문헌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