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발행 2025.05.15
서문
우리는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에 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 인권과 풍요, 평화를 우리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 그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좋은 나라의 기틀을 세워 주신 분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독립운동가들은 불굴의 항일 투사들이기는 하지만, 근대의 민주주의 법률과 제도를 깊이 이해하고, 자유와 인권 존중의 문화를 몸에 익히지 못한 분도 많았던 것 같다.
대체 이렇게 좋은 나라 대한민국을 만드신 분들은 누구인가? 그래서 우리는 제헌국회의 속기록을 읽고 제헌의원들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하고 중년에 제헌의원을 역임하신 분들 중에서 근대인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잘 알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보다 국제 질서의 흐름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인들이 요소요소에서 활약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분이 백봉 라용균 선생이다. “아, 바로 이런 분이 있었구나! 이런 분들이 계셔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UN이 「세계인권선언」에서 선포한 새로운 세상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구나! 길고 긴 전쟁에서 목숨 바친 수천만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인류의 이상과 꿈이 바로 여기 동아시아 끝의 대한민국에서 실현될 수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제헌헌법 제16조(「세계인권선언」 제26조 1항과 같다)를 읽으면서 우리는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바로 이 헌법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는 건국하면서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해방 당시 78%에 달하던 문맹률을 1950년대 말에 22%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우리가 익히 아는 당시 대한민국의 가난과 어려운 여건을 생각한다면, 혼란 속에서도 멀리 내다보는 혜안, 어둠 속에서도 본말(本末)을 구분하는 깊은 지성을 가진 분들이 바로 제헌의원들이고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임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는 그중의 한 분, 라용균선생을 공부하였다.
일찍이 일본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은 오히려 다른 분들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약관 24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파견·선출된 것은 그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으로 친구와 동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하면, 결과적으로 젊은 시절의 그가 상하이에서 겪게 되는 여러 경험들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행운아였다. 사실 임시정부에서도 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혁명·독립운동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실제적인 일이어서 화려한 말만 주고받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밀도 높은 경험이다.
그는 의회주의자로서,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로서 평생 살게 되는 또 하나의 중대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1922년, 김규식, 여운형 등 대선배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것이다. 사실 많은 청년들이 현실의 공산국가를 가보지 못하기 때문에 막연한 동경도 하고 관념적인 이론에 심취하거나 프로파간다에 속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직접 소련을 경험하고 공산주의의 실상을 보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소련을 직접 가 보는 두 가지 중대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시작점에서 영국 특유의 경험주의와, 불가지론을 철학적 바탕에 둔 정치철학과 문화를 몸에 익히게 된다.
임시정부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가 청년 라용균에게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라.”라고 조언한 뜻 그대로, 해방이 되어 건국을 할 시점에 라용균이야말로 준비된 제헌의원이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제헌국회 의사당 사이사이에 앉아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기틀이 제대로 잡힌 것이다.
훗날 원로 의원으로서 국회부의장을 할 때는 야당 소속이었으나 한일국교 정상화에 찬성하였는데, 이로써 우리는 라용균의 산업 자본주의 경제 성장과 나라의 발전에 대한 생각이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소신과 정치철학이 과연 얼마나 확고하고 깊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언행은 우리로 하여금 두고두고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백봉 라용균은 국회의원들에게 주는 ‘백봉 신사상’의 이름으로 남겨두기보다 건국자들 가운데 가장 「세계인권선언」, 즉 당대의 시대정신을 깊이 이해했던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하고, 초기 한국 민주 정의 역사의 중심에 있던, 근대 의회민주주의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실천한 정치인으로 추념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 교육의 최종 목적이 어떤 가공의, 거창한 신화로 치장한 영웅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평범한 부모와 조부모를 존경하고 앞선 세대의 노고에 감사하고, 그 분들의 고민을 이해하는 민주공화국의 성숙한 시민을 기르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후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으니, 선각자와 지도자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위인(偉人)들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분들 가운데는 우뚝하게 높이 선 봉우리 같은 분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봉우리에 올라 우리가 본 것은 주맥(主脈)이 아닌 지맥(支脈)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백봉 라용균의 발자취야말로 바로 우리가 찾던 대한민국사(大韓民國史)의 정맥(正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실로 2·8 독립선언으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을 거쳐 포항제철의 준공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주된 흐름에 백봉 선생이 발자취를 남기고 또 크게 헌신·기여하셨으니 이런 분을 달리 찾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백봉을 연구하고 백봉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대한민국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이해하는 올바른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백봉 라용균을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했던 지난 2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김주용 교수, 이상호 박사, 윤왕희 박사, 세 분이 흩어진 자료를 찾아서 좋은 논문과 원고를 쓰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 당대에는 외로웠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분, 금방이라도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와 반가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동양 신사 백봉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려 주신 세 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함께 토론하면서 원고를 검토하고, 퍼즐을 맞추어간 여러분, 백서문 5봉의 후배라 할 정읍의 정치인 유성엽 의원과 시민운동가 최영대 대표, 역사학자 이승렬 교수, 그리고 회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해 주신 백봉 연구원 사무총장 황인수 박사와 조혜랑 연구원께도 감사를 드린다.
2025년 4월
『백봉 라용균 연구』 발간위원회 위원장 주대환
백봉 라용균 연구 발간 후기
선친에 관한 연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사이 선친의 전기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선친 생시에 여러 차례 자서전 집필을 말씀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특유의 미소로 답하실 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제가 조금 강하게 권유하면서 자술 기록을 남기는 것이 공인으로서 일종의 의무라고 말씀드렸더니 역시 미소와 함께, 그러면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답하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소 잘 하시는 조크로, 당신의 자서전을 천지 창조 때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고 하셔서 저도 웃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후 몇 분이 뜻을 모아 전기 준비를 권유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선친 생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망설였습니다. 그러던 차 이번에 뜻이 있는 몇 분이 연구서 준비를 말씀하셔서 저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말하자면 흔히 있는 전기류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인 연구인 것입니다. 주대환, 최영대 두 뜻있는 분들과 이 분야에 관련하여 가장 수준 높은 연구와 저술을 하신 이승렬 박사님이 중심이 되어 작업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실제 연구와 집필을 하신 김주용, 이상호, 윤왕희 세 분 학자도 모두 해당 시기와 주제에 관하여 많은 연구와 업적을 이루신 분들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분들은 대략 3개월에 한 번씩 모여 그사이의 작업과 문제 등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와 연구원의 황인수, 조혜랑 두 박사님은 작업의 실무를 돕고 간혹 자료 등을 챙겨드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오랜 기간 연구와 토의를 거쳤는데도 최종 원고를 대하면서 참여하신 모든 분들이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고 하십니다. 저는 사람이 하는 모든 작업은(어쩌면 신이 하시는 일도) 모두가 미완성이라는 말씀으로 위로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번 연구의 출간으로 우리 민족이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관하여 새로운 관심과 문제 제기 등이 있는 경우 또 다른 작업의 가능성도 열어 둡니다. 그 사이 수고해 주신 주대환 위원장님을 위시하여 작업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출간을 맡아 주신 안종만 회장님과 조성호 이사님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2025년 4월
라종일
백봉 라용균 선생
주요 약력으로
1895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시어
1984년 타계하시기까지
1919년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중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에 가담, 주동자로 투옥되셨으며,
그해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셨습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참가하였습니다.
그해 5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 주비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독립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셨으며,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습니다.
이후
제5대 국회의원 및 보건사회부장관
제6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셨습니다.
1984년 타계하신 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셨습니다.
저자 약력
김주용
동국대학교 문학박사로 현재 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부교수로 있다. 『한국독립운동과 만주: 이주, 정착, 저항의 점이지대』(경인문화사, 2018) 등 10권, 공저로 『제국 일본이 본 동아시아: 만주 · 조선편, 1-3』(공저, 민속원, 2023), 『재만 조선인 통제(3)-‘만주사변(9.18)’시기 재만 조선인 정책』(공저, 동북아역사재단, 2022) 등 40여 권, 논문 90여 편을 집필하였다. 현재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을 위한 보편적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상호
건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맥아더와 한국전쟁』(푸른역사, 2012),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백년동안, 2015), 『한국전쟁: 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섬앤섬, 2020), 『청년을 위한 정치는 없다』(루아크, 2024), 『제국주의 열강의 해군과 동아시아』(공저, 동북아역사재단, 2018), 『4.19 혁명과 민주주의』(공
저, 선인, 2012), 『반대를 론하다』(공저, 선인, 2019) 등이 있다.
윤왕희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미래정책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전공 분야는 한국정치, 정당정치, 의회정치이며, 주요 논문으로는 “‘비호감 대선’과 정당의 후보경선에 관한 연구: 경선방식과 당원구조 변화를 중심으로(한국정당학회보, 2022)” “유신시대의 정당과 선거: 현재적 의미에 대한 재해석과 성찰을 중심으로(21세기정치학회보, 2023)”, “당내 민주주의의 전개 양상과 당원의 대표성(의정연구, 2024)” 등이 있다.
제 1 부 청년 라용균의 도전과 시련
제 1 장 출생과 일본 유학 ·························································· 13
1. 정읍 영원면 나주 나씨 가문 ·········································· 13
2. 도쿄 와세다 대학 정치과와 2.8 독립운동 ··················· 26
제 2 장 중국 망명과 영국 유학 ··············································· 42
1. 상해에서의 독립운동 ······················································· 42
2. 6년간의 런던 생활과 해롤드 라스키 교수 ··················· 77
3. 귀국 후의 간척사업 ························································ 82
제 2 부 정당과 의회 정치의 기초
제 1 장 해방 이후 정당설립과 제헌국회 의원 ················ 91
1. 한국민주당 참여 ······························································ 91
2. 한국민주당 사무국장과 5.10 총선거 ····························· 97
3. 제헌국회 의원 활동 ······················································ 101
제 2 장 실용주의 중도 의회 정치의 개척 ························ 125
1. 낙선 ················································································· 125
2. 4대 국회의원과 유엔외교 ············································ 134
3. 민주당 내의 갈등 ·························································· 143
4. 4.19 민주혁명과 보건사회부 장관 ······························ 151
5. 5.16과 쿠데타 이후 탈진영 정치 ································ 163
제 3 부 정치에 대한 태도와 철학
제 1 장 ‘자유주의적 근대인’과 의회주의 ························· 185
1. 정책중심의 실용주의 ····················································· 185
2. 의회외교의 개척자 ························································ 193
3. 합리적 의회주의자 ························································ 199
제 2 장 진영과 국가 사이에서 ··············································· 206
1. 백봉을 만든 결정적 장면들 ·········································· 206
2. ‘굽힐 줄 모르는’ 협상가 ·············································· 213
3. 품위 있는 정치 ····························································· 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