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사

SITEMAP
전체메뉴닫기
닫기
이용식교수 고희기념논문집
신간
이용식교수 고희기념논문집
저자
이용식교수 고희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역자
-
분야
법학
출판사
박영사
발행일
2025.01.24
장정
양장
페이지
420P
판형
사륙배판
ISBN
979-11-303-4889-6
부가기호
93360
강의자료다운
-
색도
1도
정가
49,000원

초판발행 2025.01,24


<서문>


* 『현대형법이론 Ⅰ, Ⅱ』(2008) 서문

머리말*

7?3 사태. 2007년 7월 3일 23시 57분 통과된 로스쿨법으로 인하여 야기된 일련의 사태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로스쿨의 유치를 위하여 대학들이 벌이는 무한경쟁은 가히 살인적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교수 숫자를 엄청 늘리고 빌딩을 번쩍번쩍하게 새로 짓고 도서를 몇 만 권씩 구입하여 수백억씩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로스쿨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저자의 머릿속에 들었던 질문은, 로스쿨의 본질은 무엇일까이었다. 본인은 로스쿨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이에 대답하는 것은 난센스이고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념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로스쿨 모습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는 그 제도적 원형(프로토팁)으로서 미국 로스쿨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로스쿨 유치를 위해 우리나라 대학들이 해야 하는 일들을 보면 또 조금 알 수 있을 것이다. 로스쿨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저자가 보기에 로스쿨의 본질적 핵심은 돈에 있다. 누가 뭐래도 결국 로스쿨은 돈이라는 것이다. 

‘로스쿨=돈’이라는 명제. 그것이 모든 것의 결론이다. 그런데 윗분들은 로스쿨은 돈으로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분들이 로스쿨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저자는 모르겠다. 로스쿨의 본질이 돈인데, 로스쿨을 돈으로 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로스쿨의 본질에 반한다. 로스쿨은 돈으로 사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로스쿨을 국민들이 결단했다. 그동안 법률가들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이라고 여겨져 왔다. 사법서비스의 문턱에 접근하려고 하면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자세를 먼저 보이는 그런 자들로 치부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허물어야 하겠다는 것이 국민들의 뜻이다. 그 수단이 바로 로스쿨의 도입으로서 법률가 숫자를 대폭 늘려 사법서비스를 개선?향상시키자는 생각이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로스쿨은 선인 것이다. 기존의 대학 학부 시스템은 악이고 폐해이며 청산의 대상이다. 국민이 선이라고 선택한 것은 로스쿨이었는데, 그러나 그 본질에는 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서민 대중과 약자를 위한다는 참여정부가 돈을 결단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로스쿨은 돈스쿨이고 이는 결국 미국에서처럼 유전무죄?무전유죄, 그리고 사법의 스포츠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민들은 이를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돈스쿨을 선택한 국민들이 1,500만 원 내외의 등록금이 비싸다고 아우성치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의 로스쿨 등록금은 5,000만 원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회계학 전문가들의 분석이고 보면, 1,500만 원 내외의 로스쿨 등록금을 책정하여 적자를 안고 살아가겠다는 우리 대학들도 뭔가 이상하다. 심지어는 등록금 무료의 로스쿨을 시행하겠다고 신청한 대학들도 있다. 로스쿨을 유치하려는 목적이 다른 어딘가 정치적 이유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로스쿨 허가에서 지역 안배 내지 지역 균형발전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강조하는 것을 보면 역시 로스쿨은 정치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로스쿨은 바로 정치이다. 우리나라 로스쿨은 정치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어 정치적으로 논의가 끝났다. 우리나라에서 로스쿨 도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이었고(참여정부 주연, 한나라당 조연, 국민 관객의 영화였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로스쿨의 비극이다. 우리 모두가 패자이다. 

이러한 로스쿨 체제하에서 법학의 모습은 어떠할지에 관해서도 로스쿨 문턱에 가 보지 못한 본인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대체로 법률 이론이 아니라 실무적인 교육이 요구된다는 말을 한다. 즉 로스쿨의 본질은 이론이 아니라 실무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하다. 이것 또한 미국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로스쿨에서 법학의 학문적 성격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 도착점은 법학의 학문적 종말이다. 로스쿨의 본질상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운명적 결단을 이미 내린 것이다. 그것이 로스쿨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스쿨법의 통과는 학문으로서의 법학에 대한 사형선고이고 법학의 학문적 성격에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필자가 전공하는 형법에 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 형법학은 쇠락해 가는 것이며, 이를 국민들은 기꺼이 선택하였다. 형법학의 종말. 그것이다. 

로스쿨 유치신청을 하면서 나라에서는 교수들에게 지난 5년간 연구업적 800퍼센트를 요구했다. 당초에는 2007년 7월 3일 법이 통과되고 8월 31일까지 이 업적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 연구업적 기준을 채우기 위해 본서가 계획되었다. 로스쿨 인가신청서에 연구업적으로 카운팅되지 않은 논문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급한 요구 때문이었다. 로스쿨이 없었더라면 본서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스쿨에 깊이 감사한다. 이 책을 로스쿨 평가위원회에 바친다.


2008년 1월 24일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이 용 식


해지는 땅 형법이론의 비가*

-이론형법학 만가, 그 상여를 메고 부르는 슬픈 노래-

* 『형법총론』 제1판(2018) 서문

로스쿨 시대의 표준적 형법 교과서 내지 기본서는 어떠한 형태의 것이어야 할까? 단언건대 그것은 가장 얇은 것이다. 기존의 형법교과서는 학생들에게 형법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형법학자와 형법전문가들이 자신이 아는 형법학과 형법판례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 페이지 내외의 두꺼운 책들뿐이다. 이들은 지나간 시대의 교과서, 어제의 교과서, 학부시대의 교과서, 사법시험 시대의 교과서일 뿐이다. 이러한 두꺼운 교과서는 로스쿨 시대와 변호사 시험에는 전혀 맞지도 않고 불필요하고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백해무익하다. 기존의 교과서들은 정말로 수준 높은 학문적 연구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교과서가 아니며 기본서가 아니다. 로스쿨 학생들이 이러한 흘러간 시대의 형법교과서나 기본서를 본다는 것은 ?똑똑한 학생들의 멍청한 선택?이다. 조금의 미련도 갖지 말고 던져버려라. 본서는 이를 되돌려 놓기 위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본서의 학문적 가치는 전혀 없다. 

법학전문대학원 시대에 대응하는 형법공부는 어떤 것인가? 변호사시험을 위해서는 가장 얇은 교과서 한 권과 가장 얇은 최근 3개년 판례정리집 한 권만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 이상 보면 낙방한다. 변호사시험에서 답안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는, 알고 있는 것을 쓸 시간도 없고 답안지공간도 없다. 그저 조문과 판례의 「결론」만을 쓸 수 있다. 그러니까 판례는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이해하면 오히려 손해다. 판례는 결론만 암기하면 된다. 판례의 논거를 이해해 보았자 답안지에 쓸 시간도 공간도 없다. 판례를 열심히 공부하여 이해한 논거를 쓰려고 하면 변호사시험에 떨어진다. 판례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암기의 대상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것도 결론만. 그것도 최근 3개년 판례의 결론만. 변호사는 판례의 결론만 알면 되는 것이다. 판례형법이라는 이름하에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 판례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판례는 규칙을 정한다. 정해진 규칙을 변경한다. 새로운 규칙을 정한다. 변호사시험은 정해진 규칙을 암기하는 것이다. 

형법이론은 닫혀진 텍스트를 열어, 거기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 것이다(저자의 죽음?독자의 탄생)(입법자의 죽음?해석자의 탄생). 이론형법학은 말해진 것 속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찾는 작업이다. 사유 속에서 새로운 사유를 분만하는 것이다. 아직 사유되지 않은 것을 불러내는 것이다. 이론적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론적 사유의 한계바깥을 사유하는 것이다. 형법이론학은 근본적으로 체계와 새로움에 대한 관심이다. 형법이론은 기존의 규칙을 근본적으로 다시 해석하고 새로운 법칙을 수립하도록 요구한다. 기존의 법칙의 전제에 대해, 그 법칙에 따른 추론과 결론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주문하는 어떤 이의제기의 원천이다. 이론형법학의 사유를 향도하는 것은 “우리의 앎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가?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다는 것이고,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자기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형법텍스트는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완결될 수 없는 것,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움직이고 생동하는 것을 계속 논의하는 것이 이론형법학의 존재방식이다. 이러한 이론형법학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최근 3개년 판례외우기」이다. 「죽은 형법이론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가 「판례외우기」이다. 새로운 로스쿨시대에서는 형법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형법모르기를 선택해야 한다.  


옛날이야기이다. 법학도들에게는 “왜 법학을 전공하려 하는가?” 하는 질문이 항상 있어 왔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항상 있어 왔다. 법과대학 입학식장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라틴어 문구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충격을 준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가 도대체 존재하는가? 단언컨대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는 그것을 사는 것(living)이다. 결국 정의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경계선에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정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으러 로스쿨에 온다. 

나의 형법교수로서의 경력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다. 최상위대학에 근무하고 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최상위대학의 공기조차 낯설다. 내가 일류 형법교수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발전을 멈추지는 않았다. 형법공부를 계속했다. 형법을 배우는 게 좋다. 이 나이에도. 일생 일연구자(一生 一硏究者).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고, 자신의 한계 너머를 사유하고, 자신과 달라지는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만큼 많은 것을 견딜 수 있는가 얼마만큼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가. 이러한 형법아리랑을 나는 오늘도 부른다. 그것은 해지는 땅 형법이론의 비가이다. 이론형법학의 상여 그 죽은 시체를 메고 부르는 만가, 그 슬픈 노래이다. 이것이 새로운 로스쿨시대의 표준적 형법교과서이다. 


2018년 1월 1일

독일 프라이부르그에서                                        

이 용 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해지는 땅 형법이론의 비가> -제2비가-

-한 형법학자의 악전고투: 이제 나 혼자 헤매어야 하는구나-

-이론형법학 선언(Das Strafrechtsdogmatische Manifest)-

-빼앗긴 자의 죽음 그 너머의 견딤-

-형법교과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 『형법각론』(2018) 서문

로스쿨의 시대는 형법교과서에 대해 새롭게 정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먼저 형법교과서가 존재론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러한 형법교과서의 존재론적 전회는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날 때 성립한다. 현대적 형법교과서 개념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는 기존 교과서의 존재방식을 해체하고 전복하고 극복해야 한다. 존재형태적으로는 가장 얇고 작아야 한다. 그리고 존재내용적으로는 시험에 나오는 ‘중요한 부분만을’ 그리고 ‘중요한 순서에 따라’ 기술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의 형법총론 교과서에서는 ‘구성요건론’ 다음에 바로 ‘공범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미수론’이 나온다. 뒷부분에 가서 ‘위법성론’과 ‘책임론’이 언급된다. 이번 형법각론 교과서에서는 시험에 가장 많이 나오는 ‘재산죄’가 맨 처음에 나온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시험에 많이 나오는 ‘인격적 법익에 대한 죄’가 기술된다. 시험에 많이 나오지 않는 ‘사회적 법익’과 ‘국가적 법익’에 관한 죄는 그중에서 출제가 되는 부분만을 기술하였다. 출제가 되지 않는 부분은 제거하였다. 이것이 형법교과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혹은 혁명이다. 그리고 기존 형법교과서는 판례에 대한 콤플렉스가 편집증의 수준까지 발전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판례중심이라는 이름하에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들은 그것이 교과서이든 수험서이든 당장 던져버려라. 우리는 오호 그 매력적인 얇은 ‘최근 3개년 판례정리집’ 하나만을 달랑 암기하면 변호사시험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판례를 이해하려고 하면 불합격은 필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 두꺼운 수험서를 붙잡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멍청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자비로운 신도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로스쿨은 “이해에서 암기에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로스쿨은 ‘의미’에 대한 물음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공간이다. 로스쿨은 이러한 자기경험을 이성적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생각할 것을 거부한다. 로스쿨 시대에 가장 커다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로스쿨에 대하여 아직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로스쿨은 아직 사유하지 않고 있다. 사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유를 망각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다(망각의 망각). 로스쿨은 사유하지 않는다. 사유를 거부한다. 다만 계산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최신 3개년 판례결론 외우기라는 정언명령인 것이다. 그리하여 로스쿨은 “규범에서 전략에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로스쿨은 가난한 청년의 첫 불행이다. 그들의 체념의 역사이고 희생의 역사이다. 자본주의는 자기 확대의 속성이 있다. 권력과 자본의 자기극대화의 논리에 근거한다. 외적인 제한을 모른다는 특징을 지닌다. 안으로부터 도모되는 자기극대화의 경향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팽창의 운동 속에 놓이는 집단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로스쿨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로스쿨은 사유하지 않는다. 아니 사유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풍요한 빈곤화과정에서 우리는 사유하는 멍청이가 되어 빈곤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경제 제일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폐허 속에 살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이 이미 다 깨져버린 것이 우리의 상태이다. 겉으로는 번성하지만 속으로는 다 파괴되어 있고 그 속이 다 깨져 버린 것이다. 밖은 있지만 안은 비어있는 정신적 폐허가 된 형법 학문의 참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특히 도서관에서 여러 전통의 책을 읽어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모습은 먼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고, 여러 나라에서 온 글들의 지혜를 배우고, 모두가 진리를 찾던 도서관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로지 폐허가 그 자리에 남아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매일 큰소리로 내가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 내가 얼마나 스펙을 쌓았는가 큰소리로 말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모든 규범이 부정되는 곳에서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어떤 리듬을 상실한 이러한 정신적 폐허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형법이론의 해바라기를 늙은 정원사가 주워서 다시 거둬들이고 자라게 하고 정성껏 길러내는 모습이다. 이는 정신적 깊이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형법적 사유의 나무와 화초를 기르는 그 폐허로부터의 순수한 새로운 “시작으로” 우리는 빼앗긴 땅, 이미 해가 진 땅, 깜깜한 밤의 세계 그 어둠의 세월도 견딜만한 것이 될 것이다. 참혹한 것을 견뎌야 한다. 더욱 견뎌야 한다. 끝까지 견뎌야 한다. 견딘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념의 창조와 체계의 구축을 전통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형법학적 담론의 방향을 사유해야 한다. 기존의 사고메카니즘이 중단되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그에 부응하는 개념을 찾아 다시 중심과 균형을 가져오도록 사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진리는 기존의 논리와 시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점을 일탈한 시각, 기존의 관점에서 삐딱한 시각 내지 비스듬한 시각에 서야 한다.

형법학적 사유란 무엇인가? 과거에 사유되었지만 충분히 사유되지 않은 것, 말해졌지만 들리지 않았거나 빠뜨린 것을 현재로 나르는 것이다. 기존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사고의 문법을 재구조화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이제까지 없던 의미와 의미의 메카니즘을 창조 생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유형의 합리성을 조형하는 것이다. 사태/사물/대상은 자신을 설명해 줄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형법이론은 아주 작은 것/지나치게 쉬운 것/변두리에 있는 것에서 거기서 전체의 징후를 본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이다.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공을 보면 한마디로 형법이론은 그 공이 아니라 그 공을 가지고 노는 보이지 않는 사람과 기술을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형법학적 사유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나라 형법학은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고 그저 순응의 수단이 되어 기성 판례와 실무질서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결국 저항과 비판의 방식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다. 스스로 실무의 도구화하는 학문은 원래의 목적을 잊는다. 실무의 도구가 되면서 결국 이론가는 얼치기 실무가가 된다. 지나치게 실무를 중심에 두다 보니까, 규범의 사고를 벗어나 전략의 사고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형법이론이란 과도하게 단순화하여 말하면 판례에 의해 통치 지배당하지 않는 사유를 말한다. 판례에의 지배와 복종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이론이다. 형법학자는 사회 속에 위치하면서도 그러나 이 사회의 기존질서에 포박된 것이 아니라, 그 질서의 밖에 자리한다. 사회의 안과 밖 사이에서 두 축 사이를 오가면서 보다 나은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점에서 형법학자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일부 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밖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형법학자는 이렇게 애매하게 선 변두리적 인간이다. 어떤 비극적인 주체이다. 거꾸로 말하여 비극적인 주체가 아니면 형법학자가 아닌 것이다.  

형법학적 사유란 무엇인가? 형법학의 자기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거기서 보편적인 것을 만나고, 보편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자기사유를 초월하여 타자사유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형법학에는 결여되어 있다. 자기반성적 자기비판적 사고의 결여이다. 다른 것은 없느냐?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라는 자기반성적 자기비판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다. 자기극복 내지 자기초월의 사고 결여는 보편적인 시야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과 의미를 우리가 과거에 익숙한 것, 과거에 알던 것으로만 환원하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 개체적인 심성은 보편적인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바탕 위에서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타자에의 마음을 열 때, 보편에의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자기 내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래성의 극복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낙후성의 극복이다. 서양(독일)의 극복보다 더 시급한 것이 동양(한국)의 자기극복이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옳다고 우리사고를 지배 통제하고 있는 사고의 틀을 끊임없이 반성적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머리말이 길어졌다. 본서의 머리말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쓸 말이 없다. 형법총론 교과서의 머리말에 필자가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머리말은 백지 빈 공간으로 몇 페이지 놔둘까 하기도 했다. 혹은 <머리말: 쓸 말 없음>이라고 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본서 형법각론 교과서의 머리말이 길어졌다. 이는 단지 할 말이 없어서 길어진 것이다. 쓸 말이 없으면 쓸데없이 주저리주저리 길어지는 법이다. 본 머리말은 ‘해지는 땅 형법이론의 비가’에 이은 ‘이미 해가 진 땅 형법이론의 비가’이다. 그래서 제2비가이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인가? 새로운 아침의 태양이 떠오를 것인가? 그 어둠의 세월을 견딜 수 있는가? 그 견딤이 형법학선언이다. 그래서 본 머리말은 ‘이론형법학 만가, 그 상여를 메고 부르는 슬픈 노래’에 이은 ‘이론형법학의 죽음 그 너머’이다. 그리하여 본서는 로스쿨시대의 표준적 형법교과서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2018년 12월 24일

독일 프라이부르그에서

이 용 식


이론형법학의 병리학*

-진리Virus의 전염병 앓는 이론형법학: 지식적 거리두기-

-해지는 땅 형법이론의 비가 <제3비가>-

-형법학의 종말 이후의 형법학: 시간이 흐르기 위한 조건들에 대하여-

-사물의 꿈: 형법학은 프락시스(Praxis)/실천이다-

 -사물의 노래: 항의(Protest)로서의 이론형법학-

-<“사랑아”> 사랑아 형법사랑아 얼마나 아프고 아파해야-

* 『과실범과 위법성조각사유』(2020) 서문

우리나라 형법학은 퇴보의 역사이다. 정신적인 질서는 다 없어진 상태이다. 이것은 우울하다(형법학의 우울). 우울이라는 것은 어떤 소멸의 책임을 자기에게 돌려 스스로 자신을 공격하고 자해하는 데에서 발병한다. 또 이것은 한(恨)이 된다(형법학의 恨). 한(恨)이란 -나라 잃은 슬픔과 같이- 이미 흘러갔지만 여전히 붙들려 있는 시간에 의해 구조화된 슬픔이다. 시간은 갔지만 나는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만해 한용운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은 한국인의 의식에 있어서는 흘러가지 못한다. 이미 오래되었는데 현재를 붙들고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내지 않으면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형법학의 종말이고, 형법학의 우울이고, 형법학을 잃은 슬픔이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기쁘고 만족하고 좋을 때는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가 가까운 것, 즉물적인 것에 국한된다. 슬플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 사라진 것, 먼 것들에 우리는 관계하는 것이다. 비애나 슬픔의 감정은 자각과 깨우침과 열림의 순간이 개진되는 바탕이 된다. 그리하여 이론형법학은 형법학의 종말 그 문명적인 파국의 역사적인 좌절 앞에서 그리하여 어떤 쇄신의 시도도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서, 학문과 정신의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려는 어떤 지적 악전고투의 표현이다.

이론형법학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론형법학은 자기반성적이다. 자기에 대한 비판적인 자기교정이다. 자기를 새롭게 개진해 가는 자기교정이다. 자신을 거슬러서 사유하는 자기역류적 사고이다. 이미 행해진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거슬러서 하는 것이다. 형법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일 수 있는지를 매번 매순간 다시 사유하는 것이다. 매순간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매번의 형법논의와 형법강의는 매번 전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도록 추구되어야 한다. 매일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재창조·재구성될 수 있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이론형법학은 이론형법학을 맹신하지 않는다. 형법학의 이론을 매번 재창조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론형법학은-매번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보이는-“실천”이다. 즉 존재하고 있는 모든 형법이론은 실패한 형법이론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성공했을지라도 그 케이스뿐이니까 이번에는 실패할 수 있다. 실패했기 때문에 재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존재하는 관념들에 의해서 규정·고착되지 않도록 하려는 자기비판적 사고가 형법학에 토대로 자리한다. 이론형법학은 기존에 존재하는 판단과 규정지움에 항의하는 것이다. (너는 너 자신을 아무 말 말고 이미 있는 기존의 질서에 끼워 넣어 짜 맞추어야 한다/있어 왔던 것들의 되풀이/상투성의 세계/이미 짜여진 틀 안에서의 주어진 세목의 기계적인 반복)  

이론형법학이란 무엇인가? 이론형법학은 진리를 확신하는 자이다. 진리를 향해가는 실천이다. 이와 달리 ‘모든 것은 다 가치가 있다. 진리는 없고 그래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그리하여 진리는 포기되고 상품가격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 가장 비싼 것이 진리가 된다. 그러나 이론형법학은 ‘진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진리는 즉 ‘이 세계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무언가’는 다수결에 의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형법학은 ‘이것이 진리다라는 실천’ 속에서만 진리가 가능하다는 어떤 태도이다. 즉 이론형법학은 ‘새로운 무언가가 도래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실천이다. ‘현실언어가 아직 포착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실천이다. ‘타자의 사유를 그대로 반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있는 것’을 사유하면 이미 타자의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되어 버린다. 이론형법학은 ‘있는 것의 사유’에 의심과 질문을 던지고, ‘없는 것’ 내지 ‘존재하지 않는 것’, ‘비존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 그래서 ‘낯선 것’, ‘비동일적인 것’을 사유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론적 사유의 핵심은 자기자신의 변형가능성에 있다. 이론적 사유가 없다면 우리는 기존 고정관념의 지배질서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될 것이다. 형법이론은 집단적으로 강제되는 이념과 범주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틀에 박힌 생각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장의 구매력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신의 상품화와 사물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타율성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하여 이론이 하는 일은 사람들의 자기형성과 자기성장을 돕는 것이다.  

이론형법학이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이론형법학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변화일지라도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대한 것이다. 뭔가 포기되고 버려지고 새로움이 출현했다면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그런데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상품자본주의-우리나라는 물질적 편향성이 아주 심한 나라이다-에서는 예컨대 자동차를 바꾸는 것이 거창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상품가격으로 표시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변화’인 것이다. 진리는 ‘변화의 가능성’이고,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진리 즉 변화가능성’을 생산할 능력을 갖는다. 이와 같이 이론형법학은 ‘새로운 사유를 산출하는 실천’이다. 지나간 시절과의 작별이 있고 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과거에는 절대적인 확신을 주었던 것이 환멸의 대상이 되고, 거짓과 오류로 보였던 것이 새로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어제가 그대로 반복되지 않고 새로운 내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 나를 지배하는 관념의 흔들림이 없다면, 이는 어제의 반복일 뿐이고 내일은 없는 것이다. 물론 고정관념의 지배를 반복하면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그러나 ‘이미 설정된 지식의 한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물론 ‘새로운 관념을 내가 발명’해 내는 것은 고통스럽고 불확실하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전혀 아니고 그리하여 불안정적이다. 그러나 ‘타자의 관념에 복종’하여 즉 고정관념의 지배에 ‘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윤리적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삶의 태도이지 ‘윤리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새롭지 않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지점 즉 ‘기존의 지식이 정지’하는 지점이 바로 새로움을 만들기 위해 출발하는 장소이다. 그곳이 진리의 장소이다. 그리하여 이론형법학은 ‘타자의 해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해석에 저항’하는 것이다. 타자에게 해석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이렇다’고 말할 때, ‘달리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기존 고정관념의 지배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형법학적 사고는 ‘확산되는 타율성에 대한 저항’으로 자리한다. 이와 같이 이론형법학은 자신의 윤리적 변화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론형법학은 이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이다. ‘이론을 넘어서는 것’, ‘비이론적인 것’ 혹은 ‘이론 이전의 어떤 것’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이론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이론의 또 다른 가능성을 성찰하는 것이다. 즉 ‘이론’은-‘이론의 이해라기보다는-‘이론을 사는 것’(living)이다.

이론형법학이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지식의 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붕괴’이다. ‘지식’=‘지식에서 거리두기’(지식적 거리두기, wissenschaftliche Distanzierung) 이다. 지식은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다(지식≠지식쌓기). 지식을 쌓아서 지식의 제1인자 Top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초과되어야 한다(지식=지식초과). 지식은 자신의 붕괴 속에서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간이다. 지식은 이와 같이 지식의 안과 밖 그 경계에 위치한 사고이다. 지식은 지식의 허망함을 깨닫게 해 준다는 조건하에서만 유용한 것이다. 지식은 (기존)지식이 아닌 (새로운) 다른 무언가를 자처하는 순간이 바로 진리의 차원에서 지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진리라는 병에 걸렸을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의 병이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이론형법학은 뜬구름을 잡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이 세상에는 실용적으로 필요 없는 것을 탐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태도는 이론형법학이 진리의 전염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러한 언어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론형법학이 걸려 있는 바이러스 전염병은 그런 거다. 이 전염병은 ‘우리를 진리로 데려간다’는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아주 선한 병이다(형법을 하지 않는 일상의 모든 나머지 순간에는 우리 모두는 ‘세속의 환상’이라는 일반적인 전염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론형법학은 병이다. 일종의 정신병이다. 진리를 향한 정신적인 전염병이다. 이론형법학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려고 하고,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흔들려고 하고 그 모든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진리충동과 관련되어 있다. 그와 같은 정신병이 이론형법학의 병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론형법학은 우리를 진리로 데려간다. 이론형법학은 바로 그러한 진리를 향한 전염병에 걸린 담화의 구조이다. 진리는 이성이나 합리적인 접근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병적인 것이다.


이러한 두서없고 뜬금없는 언급들은 우리가 이론형법학의 참상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형법이론이 파괴된 만큼 형법이론학을 다시 정립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조건을 그려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현실화하는 실천적 행위가 이론형법학이다. 절망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형법비가이다. 인간의 내면은 주어진 상황과의 관계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일 수 있다. 이러한 내면의 요구는 단순히 공리적 계산에 일치하지 않는다. 돈은 모든 것을 평준화한다. 돈은 모든 가치의 공통분모이다. 돈은 모든 사물의 핵심, 특유의 고유성, 특별한 가치, 유일성, 비교불가능성을 없애 버린다. 돈은 질을 양으로 평준화해서, 어떤 것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가치를 없애 버린다. 그 평준화된 가격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론형법학은 그러한 돌이킬 수 없는 공리적 동기를 넘어서, 보다 깊은 자기성장에의 요구이며 절망적 상황에서도 스스로 ‘중심을 보전하고자 하는 의지’에 관계된다. 상품자본주의는 진실과 거짓을 초월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숨어들어 가게 만든다(풍요한 빈곤의 시대 / 번영의 빈곤의 시대). 정신은 쇠퇴하고 소멸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은 지속된다. 이론형법학의 연구는 내면의 부름에 대한 대답이다. 냉정한 계산의 소산이 아니라 정열의 소산이다. 모든 것이 파괴된 가운데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둠의 세월도 기꺼이 견딜 수 있다. 폐허에서 다시 한번 희망하자, 진리Virus의 전염병 앓는 이론형법학이여!

<“사랑아”>, 형법사랑아! 혼자서 불러 보는 가슴 아픈 그 이름(형법)/눈물이 새어 나올까 봐 입술을 깨물고/또다시 다짐한 듯 가슴을 펴 보지만/홀로 남겨진 내 모습이 더욱 초라해져/사랑아. 그리운 내 (형법)사랑아 이렇게 아픈 내 (형법)사랑아 얼마나 아프고 아파해야 아물 수 있겠니/사랑아. 미련한 내 (형법)사랑아 버릴 수 없는 내 욕심에 못다한 (형법)사랑이 서러워서 또 이렇게 운다 얼마나 아프고 아파해야 아물 수 있겠니. 내 (형법)사랑아.


본서는 본인의 정년기념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은덕을 베풀어 주신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소장이신 정긍식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올린다. 존경하는 교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본서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교수님은 출간의 과정에서 나의 많은 신경질을 그 크나큰 가슴으로 품어 주셨다.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뭉클하다.


이 봄과 이 봄의 하늘을 모두에게 보내며

2020년 4월 4일

이 용 식


제2판 머리말*

이론형법학 Virus의 팬데믹과 반팬데믹

-해지는 땅 형법이론의 비가: <제4비가>-

-속지 않아서 파문당한 사람의 진리를 위한 방황-

-권력에 대하여 충실하지 못한 자가 하는 것에 대한 충실성-

-미래를 유산으로 물려받기-

* 『형법총론』 제2판(2020) 서문

제1판 머리말(=제1비가)은 형법학의 모든 것이 파괴된 가운데 새로움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교과서의 존재형태부터 가장 얇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얇은 것이 진리다. 두꺼운 것은 진리가 아니다. 두꺼운 교과서의 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두꺼운 책의 종교에 속지 마라. 두꺼운 책은 그것을 들고 다니면 (당연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히로뽕일 뿐이다. 머리 나쁜 그런 멍청한 학생들이 아직도 대다수이다. 머리 좋은 최상위 학생들은 가장 얇은 교과서 하나를 읽고 최신 3개년 판례 요약집을 달달 외우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바로 여기에서 바로 이렇게 해야만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법하기’란(=‘형법학’이란) 무엇인가? 통설과 판례에서의 ‘통념’과 ‘통념으로 이루어진 생각틀’을 낯설게 여겨 비판적 거리를 취하는 것이다. 자신을 마주하고 자신 너머까지 보려는 생각하기이다. 이해하는 것은 필요없다. ‘일반적인 지식’을 어떻게 날카로운 무기로 만드는가 하는 기예이다. ‘자신만의 지식’을 생산해 내는 사유이다. 타자의 지식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정관념이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는 것이다. 타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무너뜨리는 실천’이다. 알도록 강제당하고 학습당하는 것을 몰락시키는 것이다. 타자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창안해 낼 것인가 하는 여정이다. 그것은 각자에 의해서 발명되는 것이다.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형법학은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실천 속에서만 실현될 것이다. 주어진 것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스스로 창안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법이론가를 만드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파면이라는 것이다. 형법이론가는 사회적 협의를 통해 정립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정립된 사태로부터 추락하고 이탈하는 존재여야 한다. 사회적 한계 내부로부터 해임된 존재여야 한다. 권력에 대하여 충실하지 못한 자의 충실성을 지켜내는 존재이다. 이론형법학은 ‘나’의 존재가 ‘다른 나’의 존재로 이행하는 것이며 ‘새로운 나’의 존재가 되는 사건이다.  

좌우 편 가르기가 사고의 기본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한마디 말이 옳다고 주장되어도 그것은 곧 다른 말에 의하여 대치될 것이다. 우리가 궁리하고 만들어내는 명제는 얼마나 오래 타당성이 있을 것인가. 산업문명의 발달이 인간정신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것에 문제를 가져온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숨어들어 가게 한다. 사람들은 어질러진 일들 가운데 넋을 잃었다. 모든 것이 생각없이 부셔져 버렸다. 똑같은 무언가가 매일의 일상을 지배하고 반복된다. 모든 지식은 상품화 가능한 지식으로 만들어져 버렸다. 오늘날 창조성을 강조하는 것은 상업적인 의미를 가진 소위 문화콘텐츠의 생산에 단지 그것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뿐에 불과하다. 물론 현실의 문제는 현실의 문제대로 해결을 하여 우리의 통용되는 기준에 의하여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싫든 좋든 결론을 내야 한다. 그때그때의 룰에 의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궁극의 답은 아니다. 그것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또 찾아내어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 이론형법학이 하는 일이다. 이론형법학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대지는 못해도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에 대해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느냐를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용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삼각형의 두 변의 합은 다른 한 변보다 크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은 실용적인 현실생활의 측량 문제하고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증명하겠다고 할일 없는 짓을 한다. 도대체 왜?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과학기술문명은 고등수학이 그 바탕에 있어서 나온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있는 거의 모든 것은 실용성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나온다. 이것이 이론형법학의 본질이다.  

범죄론이란 ‘범죄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담론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왜’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 존재하는지 하는 사유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범죄가 무엇인지’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가 무엇일 수 있는지’를 타진하는 것이다. ‘범죄를 그렇게 바라보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법조문 텍스트는 원래 (다른) 해석에 열려있는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입법자의사설은 해석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자신을 유일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조문 텍스트는 즉각적으로 바로 그 의미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후에 사후적으로 항상 재규정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등장할 때부터 영원불변한 의미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조문은 새로이 도래할 해석자를 기다리는 텍스트이다. 현재의 해석을 무너뜨릴 도래할 해석자를 기다린다. 결국 이론형법학은 미래를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이다. 


    2020년 8월 20일

이 용 식

간행위원회 명단


이용식교수 고희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위원장  장 성 원 (세명대학교 법학과 교수)

위  원  김 봉 수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 상 오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김 정 현 (서울대학교 법무팀장/변호사)

        김 태 훈 (판사)

        류 부 곤 (경찰대학 법학과 교수)

        서 효 원 (법무부 행정소송과장/부장검사)

        안 정 빈 (경남대학교 법학과 교수)

        우 인 성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윤 영 석 (변호사)

        이 순 욱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차례>



제1장  ‘불법영득의사’에 대한 고찰 1

김봉수


제2장  상당인과관계설에서 상당성의 의미에 대한 재고찰 39

-상당인과관계설의 발전적 해체를 목표로-

류부곤


제3장  결과의 조기발생 사례 59

최준혁


제4장  인식의 불확실성과 미필적 고의 81

-영미 형법상 ‘의도적 무지(willful ignorance)’ 개념에 비추어-

홍진영


제5장  착오-형법학 논고 111

김상오


제6장  과실부작위범에 있어서의 동가치성/상응성 137

-부작위범의 세 가지 분류기준을 중심으로-

안정빈


제7장  과실범의 공동정범에 관하여 163

김태훈


제8장   보증인의무의 체계상 지위와 착오 177

장성원


제9장   (부작위에 의한) 사기죄 구조의 재검토의 단초 207

김정현


제10장  순차공모와 공범 225

이순욱


제11장  공동정범의 초과실행에 관한 판례의 태도 243

김웅재


제12장  간접정범의 실행 착수 및 장애미수/불능미수/불능범 구별에 관한 사례 285

-서울서부지방법원 2023. 10. 12. 선고 2023노180 판결-

우인성


제13장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에 관한 착오의 불법성과 관련한 의문 315

김재현


제14장  연결효과에 의한 상상적 경합 사례의 해결 방안 335

-스토킹범죄처벌법위반을 중심으로-

서효원


제15장  간병살인에 관한 연구 363

윤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