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2023.09.25
역자의 말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에 왔다.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낯선 이 세상에 던져졌다. 누가 맘먹고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원래 짜인 각본대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도 모른 채 하여튼 우린 여기에 와 있다. 기왕에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의 존재가 그런 거라면 잘 살다 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일지 모른다. 잘 살다가 다시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듯하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제멋대로 한바탕 웃으며 살아간다.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짐작도 못한 채 제멋대로 산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구나 끝내 취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언젠가는 병을 얻거나 다쳐서 환자가 된다. 이게 삶일진대 누가 그 매정함을 탓하랴.
환자가 되면 우린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는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고개를 돌리던 병원이 이젠 고향집 같다. 뻣뻣하던 의사와 간호사의 얼굴이 그리워진다. 내가 이리 아픈데 설마 나를 외면하진 않겠지. 내 얼굴이 이처럼 간절한데 어찌 내 앞에서 냉랭하게 고개를 돌릴 수 있겠어. 혹시 너무 바빠서 그런다 해도 난 괜찮아. 내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모두 다 참을 수 있어. 그렇다. 위기를 맞아 마음이 연약해진 우리는 다 감수할 수 있다. 내 몸이 예전처럼 돌아올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병을 얻은 환자는 치유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녹록하지 않은 길을 뚫고 진료실을 찾는다. 의사를 만나야 뭔가 하소연을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심장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제멋대로다. 뛰는 가슴을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다. 뭐가 그리 무서운지 모르겠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꼭 누가 날 잡으러 오는 것 같다. 의사와는 눈을 맞출 수가 없다. 그래도 간호사가 나을 것 같아 그녀에게 맥없이 미소를 보낸다. 흐르는 침묵이 두렵다. 컴퓨터 화면을 보는 의사의 눈길을 기다리는 내 맘이 애처롭다. 환자는 어렵게 의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거절당할까 두렵다. 부디 앞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나의 치유를 위해 노력할 결심을 해주길 두 손 모아 빈다. 의사와 간호사도 잘 알고 있다. 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우리의 목표는 환자의 치유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환자와 의료진이 마음을 맞추는 일이다. 아무리 서로의 목표가 똑같고 모두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상호간에 마음을 맞추지 못하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의사-환자 간의 긴밀하고 긍정적인 상호관계인 것 같다.
진료실에서는 누가 뭐래도 의사가 주도권을 가진다. 고객이 왕이라고 환자가 최우선이라고 쉽게들 말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믿는 환자나 환자 가족은 없을 것이다. 진료의 목적이 환자의 의학적인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기 때문에, 진료실에서는 의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절대적이다. 따라서, 도움을 청하는 입장에 있는 환자는 의료진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빌리는 대가로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게 된다. 의사들은 이런 힘의 불균형을 자칫 잘못 이해함으로써 환자를 오랫동안 함께 걸을 동반자로 생각하기보다 이끌고 가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기 쉽다. 이와 같이 잘못된 의사의 판단과 태도는 환자를 진료과정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의사-환자 간 상호작용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긍정적인 의사-환자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끝내 효율적인 진료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진료 성과는 진료실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의사와 진료실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의료인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환자가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면서 의료인들과 병원에 힘을 실어주는 일은 환자가 어떤 이유로든 병원을 떠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환자가 떠나면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장기간 질환과의 여정을 걸어온 환자들이 자신들과 관계를 맺었던 다양한 의료인들, 특히 의사들을 기억하며 인터뷰한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환자들은 특히 자신들과 의료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다. 감동스러웠던 순간은 물론 섭섭했던 관계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의사의 잘못된 태도를 일깨워주고 진정 유익한 상호관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의술의 의미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도 가르쳐준다.
이들의 가르침은 때론 감사하고 때론 아프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다 너무나 소중하다. 특히 진료실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에게 더없이 귀한 지침을 제공한다. 저자들은 그 내용을 대표할 수 있는 제목으로 “What Patients Teach: The Everyday Ethics of Health Care”를 사용했다. 우리는 이 책의 내용을 모두 번역한 후에 적절한 제목을 찾기 위해 다각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끝내, 이 번역서의 제목이 의사-환자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좋은 의사 나쁜 의사: 환자들이 체험으로 말하다”는 이런 고심 끝에 선정한 제목이다.
환자들의 가르침은 준엄하다. ‘나쁜 의사’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외면한다면, 환자들은 단호하게 회초리를 들 것이다. 의사가 의사일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을지 모른다. 환자들의 가르침은 따뜻하다. ‘나쁜 의사’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좋은 의사’로 탈바꿈한다면, 환자들은 뜨거운 박수와 함께 감사의 포옹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감동의 스토리를 함께 만들어갈 것이다. 환자들의 가르침은 창조적이다. ‘좋은 의사’가 그 따뜻한 체온을 쉬지 않고 동료 의료인들과 세상에 전파한다면 환자들은 그에게 하염없는 애정과 존경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훌륭한 의사들과 함께 따뜻하고 효율적인 진료실 그리고 한층 밝아진 세상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임상의사로 살아온 40여 년을 되돌아보면, 수많은 환자들의 맑고 밝은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비좁고 혼잡한 진료실에서 부족한 의사와 함께해준 환자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환자들의 가르침에 고개를 숙인다. 풋내기 의사를 채찍으로 가르쳐서 오랫동안 임상의사로서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해준 나의 환자들 아니 나의 스승님들께 큰절을 올린다. 더불어, 큰 가르침을 주신 환자들께 이 책을 바친다.
환자들이 장기간 걸어온 질환과의 여정은 물론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부르짖음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 임상의사의 오랜 경험과 함께 사람과 삶이 좋아 소설에 파묻혀 살아온 인문학자가 어렵게 마음을 맞추었음을 밝혀둔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 이경란 박사의 격려와 너그러운 동료애가 없었다면 감히 이 책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수줍게 밝히고 싶다.
2023년 여름
여의도공원을 걸으며
정영화
감사의 말
우리는 이 책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한 다음의 여러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밴더빌트 통합건강센터 책임자인 Roy O. Elam은 우리가 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우리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를 꾸준히 격려해주었다. 옥스포드 대학교 출판부의 Peter Ohlin과 그의 가장 유능한 동료인 Lucy Randall은 출판 과정의 모든 일들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었다. Katie Haywood는 원고의 서식을 만드는 데 뛰어난 기술을 발휘해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원고를 이렇게 훌륭하게 준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Jessica Ryan은 원고의 최종 버전을 최고의 솜씨로 편집해주었다. 처음부터 우리의 목적을 이해했던 Kathryn Montgomery는, 그녀가 이전에 발간했던 우리의 책인 치유자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의 계획서와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해 주었다. 결정적인 단계에서 우리 원고에 대해 빈틈없는 논평을 해준 Howard Brody, 예리하고 솔직한 편집 작업으로 우리를 도와준 Allison Adams에게 감사를 드린다.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보로의 호스피스 및 완화의료(HPCG) 센터 의료책임자인 JuanCarlos Monguilod와 다른 행정직원들은 호스피스 환자들 14명과의 인터뷰를 하는 데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우리 연구에 대해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그들로부터 동의서를 받아준 HPCG의 뛰어난 사회복지사들인 Holly Bessey, Anne Batten, Debbie Garner, Beth Mills, 그리고 Madara Shillinglaw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치유자를 위한 인터뷰에 응해 주시고, 그 후에 우리가 인터뷰할 환자들의 명단을 우리에게 제공해준 의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통상적인 치료의 풍부함과 지혜에 대한 Ruel Tyson의 가르침은 수십 년 동안 우리의 기준점이었다. 밴더빌트 대학교의 생의학윤리와 사회를 위한 센터에서 일하는 학자들과 교사들, 그리고 특히 센터 책임자인 Keith Meador에게 감사드린다. 색인 작업을 도와준 동료 Paula DeWitt, 그리고 우리를 늘 웃게 해주는 유능하고 쾌활한 조교 Denise Lillard에게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누구보다 우리가 가장 큰 빚을 지고 고개 숙여 감사해야 하는 이들은 우리의 인터뷰를 허락해준 환자들과 우리 인터뷰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도와준 그들의 가족들이다. 우리들이 그들의 통찰력 중 일부나마 받아 적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대만족이다.
Larry Churchill은 이 프로젝트에서 재미와 배움을 얻은 것에 대해 공동 저자인 Joe와 David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든 먼 곳에 있든, 살아 있든 이미 고인이 되었든 간에, 그가 사는 동안 그를 겸손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영감을 준 모든 가족들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늘 그렇듯이, Sande에게 감사를 표한다.
Joseph Fanning은 상호성에 기반을 둔 가르침과 웃음, 엄격함 그리고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독서 모임에 대해 공동 저자인 Larry와 David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그의 부모 Tom and Gail Fanning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더불어 매일 밤 집에서 그를 포옹으로 맞이해준 아이들, Ben, Mia, 그리고 Willa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Carrie의 호기심과 동료애에 감사한다.
David Schenck는 현상학과 생명윤리가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Dick Zaner에게 감사한다. 스토리들을 듣고 또 들어준 Kelia Culley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끝으로, Polanyi가 말한 바와 같이, 심층 연구에 필수적인 유쾌함을 경험하게 해준 공동 저자 Larry와 Joe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