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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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신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저자
강성학
역자
-
분야
정치/외교학 ▷ 정치/외교 일반
출판사
박영사
발행일
2022.08.01
개정 출간예정일
페이지
552P
판형
신A5판
ISBN
979-11-303-1586-7
부가기호
93340
강의자료다운
-
정가
33,000원

초판발행 2022.08.01


“인간이란, 누구보다도 역사가들이란,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기의 상상력에 멋진 여유를 부여하고,
그리고 진실의 대가로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고 노력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우리들 대부분은 나폴레옹을 말하면 레오 톨스토이의 방대한 소설보다는 그것을 영화화한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에서 나폴레옹이 1812년 눈 덮인 추운 겨울에 모스크바(Moscow)에서 철수하면서 완전히 패퇴하는 비극적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나폴레옹 생애의 마지막 “워털루”(Waterloo) 전투를 포함하여 그가 치른 어떤 전투보다도 더 생생하게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일생동안 치른 총 60번 전투에서 오직 7번 패한 전투들 중 하나였다. 그 참담한 패배는 전쟁의 신(the God of War)이라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못 선택한 전쟁 수행전략의 결과였다. 그는 러시아 제국을 침공할 때 제국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전략적 힘의 중심부(the center of gravity)로 간주하여 결국은 텅 빈 채 불타고 있는 모스크바를 헛되이 점령한 결과였다.
나폴레옹은 “적에 의해서 점령된 수도는 순결을 잃은 소녀와 같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일단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면 순결을 상실한 소녀처럼 수도를 점령당한 국가는 고분고분 할 것이라고 나폴레옹은 믿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가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였다. 모스크바는 옛 수도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구 수도 모스크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나폴레옹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알렉산더 1세의 러시아 제국에게 힘의 중심부는 옛 수도 모스크바에 있지 않고 그의 충성스럽고 막강한 군대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동장군(General Winter)의 저주로 당장 몰락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 한 번의 전략적 오류로 인한 프랑스 원정군의 모스크바로부터의 참담한 후퇴는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제는 그의 동맹국들마저 서서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전 유럽의 공동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거의 2년이나 건재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가 거듭한 혁명(쿠데타)과 계속된 전승의 길에서 프랑스와 자신의 권좌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사조 같은 나폴레옹은 그의 마지막 도박이었던 워털루의 결전에 나섰고, 결국 패배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후 그는 전설적 영웅으로 기억되었다.
역사철학자 헤겔(Hegel)의 “세계사적 사나이”(a world historical man)였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아들을 자처했지만 종국에는 프랑스 혁명을 말아먹은 “혁명의 배신자”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9년 제1통령(the First Council)이 된 후에 고대 로마의 킨키나투스(Cincinnatus) 대신에 시저의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근대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을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길을 가지 않고 영국 청교도 혁명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의 원초적 원인이었다. 19세기 중반 2월 혁명 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도 혁명가-대통령-황제의 길, 즉 자기 큰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혁명의 목적이었던 민주 공화정을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Bismarck)의 프러시아에 패배한 뒤 제3 공화국이 탄생될 때까지 거의 1백년이나 후퇴시킨 셈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궁극적으로 그리스 비극의 테마처럼 자신의 오만(hubris)으로 인해 스스로 몰락한 하나의 비극적 인물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폴레옹은 모든 의미에서 자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기 시대의 구현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에 관해서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려했는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0년대에 세상에 등장했을 때 세계는 전쟁 중이었고 인간사회의 기본적 토대가 의문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자기이익을 위해 행동했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조약을 파기하고 동맹국들을 배신했던 패권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세계였다. 모든 측의 군주, 정치가, 그리고 사령관들이 비슷한 수준의 무서운 침략, 탐욕, 무감각, 그리고 만행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는 전장에서 승리가 영광의 극치였고, 그리고 나폴레옹의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영토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의견에 대해 그가 성취한 미증유의 지배에 대한 나폴레옹의 “위대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유일하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의 세계는 충분히 장엄하고 용기가 있었다면, 심지어 군사적인 패배에서마저, “잘 죽는 것” (good death)이 상당한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나폴레옹의 시대를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당시에 관련된 어떤 국가에게 도덕적으로 우수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역사적 속임수였고 또 권력의 욕구를 규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치적 필연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권력은 부와 우정과 함께 개인의 행복의 본질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에게 권력 획득의 욕구는 선천적일 뿐만 아니라 유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권력의 욕구가 인간들로 하여금 지배하게 하고 그리하여 공동체들을 조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사회적 조직도 한 개인이나 더 많은 개인들이 타인들에게 명령을 하는 권력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89년은 인류역사의 전환의 해였다. 그 해는 두 개의 혁명을 품었다. 하나는 혁명의 완성을, 그리고 또 하나는 혁명의 시작이었다. 전자는 미국의 독립 혁명의 완성을 의미하는 공화정의 미합중국이 수립된 것이고, 후자는 프랑스 대혁명의 폭발이었다. 후자는 전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두 개의 혁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전자가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혁명이었다면, 후자는 평등의 구현을 위해 기존 신분계급을 타파하려는 공세적 혁명이었다. 전자의 상징적 인물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라면 후자의 상징적 인물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였다. 워싱턴은 희망의 정치를 의미했고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의 정치를 의미했다. 워싱턴은 후임자에게 자발적으로 정권을 물려주고 로마의 위대한 킨키나투스(Cincinnatus)의 길을 갔다면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폭군으로 루이 16세처럼 후임자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혁명이 1789년 독립 후 안정화의 돌입을 의미했다면 프랑스 혁명은 불안정한 혼돈과 공포의 출발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혼돈과 공포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안정된 정치질서를 수호할 새로운 영웅이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이때 혜성처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장군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장군-정치가(a general-stateman)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유럽에서 사나이들 중의 사나이(man)였다. 그는 역사적 거인들 중의 거인(giant)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설적 스토리는 1769년 코르시카(Corsica)에서의 출생부터 1821년 대서양 한복판의 아주 작은 섬인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로 마지막 추방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아직 20대에 수세기 동안 모든 유럽의 군사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군사적 명성을 획득했다. 그는 30대에 프랑스를 지배했고 40대에 샤를마뉴(Charlemagne) 이후 아니 어쩌면 진정으로 시저(Caesar) 이후 어떤 개인도 하지 못했던 유럽을 지배했다. 그가 수행한 전쟁들은 유럽의 지도를 영원히 바꾸었고 그곳의 수백만 주민들을 무덤으로 일찍 보냈다. 그러나 그의 몰락도 그의 부상만큼이나 장대하고 신속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비극적 종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의 아들”로 자처했던 나폴레옹의 유산은 인류의 역사 발전에 긍정적으로도 기여했다. 나폴레옹은 말을 탄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on horse- back)를 대변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20세기에 등장한 전체주의적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가 미증유의 효율적인 감시체제를 수립했을 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는 자기 신민들의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또한 그는 그가 정복한 땅을 프랑스인들이 직접 통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 땅은 오직 주민들에 대해 승리함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서 현지인들에게 자신을 동정적으로 만들 조건으로 자신을 제시하려고 모색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럽을 근대화하기를 희망했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은 1792년 발생한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 때 그는 일개 소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의 짧은 휴지기간을 제외하고 1814년까지 계속해서 전쟁을 했다. 어느 편이 전쟁의 발생과 계속된 적대행위에 책임이 있는지는 쓸모없는 논쟁이다. 왜냐하면 책임은 어느 한편에만 공정하게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나폴레옹에게 책임을 돌리는 전사자들은 모든 교전 당사국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나폴레옹은 자기 병사들의 생명을 낭비하지 않았다. 혁명정부의 7년(1792-1799) 동안에 프랑스군의 손실은 4~5십만 명에 달했다. 나폴레옹 통치의 15년 동안에 군 손실은 8~9십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 숫자는 사망하고, 부상당하고 그리고 병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가 전쟁을 계속하면서 극적으로 상승한 보고된 행방불명자들도 포함했다. 따라서 전투의 손실은 혁명 기간 동안보다는 중포(heavy artillery)의 점증하는 사용과 훨씬 더 큰 군대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통치 하에서 낮았음이 분명했다. 행방불명자로 분류된 병사들의 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타국에서 정착한 탈영병 들이었다. 이것이 전쟁의 고통을 감소시키지는 않지만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역사를 잊으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 역사는 항상 흥미롭지만 생명이 없는 과거의 사건들의 제시는 날짜와 전투와 조약들로 축소된다. 소위 사회경제적 사관에서 쓰인 역사에는 실제로 그 사건들은 창조한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전체적 상황에 관한 얘기가 없다. 그러한 근시안적 견해와 제시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독자가 인간이 그의 자신의 시대에 처해있는 것으로 보아야하는 현실감과 이해를 도입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역사가 단조로운 사건들의 나열에서 벗어나 생동감을 갖게 될 것이다. 특히 혁명과 전쟁으로 점철된 나폴레옹의 생애가 생동감 없는 나폴레옹의 스토리로 구성된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스토리는 단지 그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했으며 왜 궁극적으로 실패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근대 유럽의 형성에 기여했는가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자신들 깊숙한 내면 속에 무엇이 있는가, 즉 인간본성과 그것이 압력과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에 관한 분석이다. 우리는 나폴레옹의 야심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의 실례를 통해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그의 비극적 종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에게 중요한 많은 정치적 및 군사적 교훈들을 얻을 수 있을 역사적 영웅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폴레옹이 21세기 우리에게 여전히 인간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교훈을 주는 적어도 “역사적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동기와 기대감으로 오랫동안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마침내 본서의 집필에 착수한 것이다.
본서를 집필하고 출판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나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이영석 한국지정학연구원 원장은 나폴레옹에 관한 집필을 구상만 하고 있을 때 나폴레옹과 관련된 10여권의 책들을 구매해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막상 집필을 시작하고 보니 그 후에도 계속해서 더 많은 책들을 구입해야 했다. 그러나 처음에 구매해준 책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진정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본서가 모두 영어 문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집필되다 보니 그 과정에서 직면한 가장 큰 난제는 수많은 프랑스어의 인명과 지명의 정확한 발음의 표기 문제였다. 그것들은 불한 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난제도 두 분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프랑스에 유학했던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의 강찬옥 교수와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국전략문제연구소의 부소장인 주은식 장군이 수많은 프랑스어의 정확한 발음 표기를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교의 고통스러운 장시간의 교정작업까지 해주었다. 두 분에게 참으로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필요한 문헌의 수집과 교정은 물론이고 참고문헌과 찾아보기를 작성하면서 본서의 출판을 위한 모든 작업과정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의 모준영 박사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나의 마지막 저서가 될지도 모르기에, 나의 소중한 벗 엄규홍 학형에게도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그의 각별한 격려와 변함없는 우정에 감사하는 마음을 이곳에 기록하고 싶다.
끝으로 항상 그랬듯이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내조로 본서의 오랜 집필과정을 도와준 아내, 신혜경 여사에게 또 다시 거듭 감사한다. 그리고 본서는 나의 장남 강상온에게 그의 존재만으로도 우리 부부에게 기쁨을 준데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담아 본서를 헌정한다.

2022년 5월 5일
나폴레옹 서거 201주년에
구고서실(九皐書室)에서
강성학

강성학(姜聲鶴)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모교에서 2년간 강사를 하다가 미 국무부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생으로 도미하여 노던 일리노이 대학교(North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 1981년 3월부터 2014년 2월말까지 33년간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평화연구소 소장, 교무처장 그리고 정책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4년 3월 이후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저자는 1986년 영국 외무부(The British 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의 펠로우십(Fellowship)을 받아 런던정치경제대학(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객원교수를, 1997년에는 일본 외무성의 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의 펠로우십을 받아 도쿄대학의 동양문화연구소에서 객원 연구원 그리고 2005년 말과 2006년 봄 학기에는 일본 와세다대학의 교환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제9대 한국 풀브라이트 동문회 회장 및 한국의 영국정부장학수혜자 모임인 한국 셰브닝 동창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동안 한국국제정치학회 상임이사 및 한국정치학회 이사, 한국유엔체제학회(KACUNS)의 설립 사무총장과 제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이것의 모태인 미국의 유엔체제학회(ACUNS)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2011년 영국에서 출간한 영문저서 ≪Korea’s Foreign Policy Dilemmas: Defining State Security and the Goal of National Unification≫ (425쪽. 2017년 중국 사회과학원 출판사가 번역 출간함)을 비롯하여 1995년 제1회 한국국제정치학회 저술상을 수상한 ≪카멜레온과 시지프스: 변천하는 국제질서와 한국의 안보≫(688쪽)와 미국의 저명한 외교전문지인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그 서평이 실린 ≪이아고와 카산드라: 항공력 시대의 미국과 한국≫(807쪽)이 있다. 그의 대표작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러일전쟁의 외교와 군사전략≫(781쪽) 및 ≪소크라테스와 시이저: 정의, 평화, 그리고 권력≫(304쪽), 또 한동안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던 ≪새우와 고래싸움: 한민족과 국제정치≫(402쪽)가 있다. 또한 2007년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인간神과 평화의 바벨탑: 국제정치의 원칙과 평화를 위한 세계헌정질서의 모색≫(756쪽), ≪전쟁神과 군사전략: 군사전략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논문 선집≫(446쪽, 2014년 일본에서 번역 출간됨), ≪평화神과 유엔 사무총장: 국제 평화를 위한 리더십의 비극≫(328쪽, 2015년 중국에서 번역 출간됨), ≪무지개와 부엉이: 국제정치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논문 선집≫(994쪽)을 비롯하여 지난 33년 간의 교수생활 동안에 총 37권(본서의 말미 저서 목록을 참조)에 달하는 저서, 편저서, 역서를 냈다. 저자는 한국 국제정치학자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연구주제인 “전쟁”, “평화”, “한국외교통일” 문제들에 관한 각기 집중적 연구결과로 볼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인간神과 평화의 바벨탑≫ 그리고 ≪카멜레온과 시지프스≫라는 3권의 저서를 자신의 대표적 “학술저서 3부작”으로 꼽고 있다. 아울러 2013년 ≪평화神과 유엔 사무총장≫의 출간으로 “인간神”, “전쟁神”, “평화神”이라는 일종의 “神”의 3위일체를 이루었다. 퇴임 후에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지정학연구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17년 가을학기부터 2019년 봄학기까지 극동대학교 석좌교수였다. 그리고 ≪한국의 지정학과 링컨의 리더십≫(551쪽), ≪죽어도 사는 사람: 불멸의 링컨 유산(김동길 교수 공저)≫(333쪽), ≪윈스턴 S. 처칠: 전쟁과 평화의 위대한 리더십≫(449쪽), ≪조지 워싱턴: 창업의 거룩한 카리스마적 리더십≫ (501쪽), ≪대한민국의 대부 해리 S. 트루먼: 평범한 인간의 비범한 리더십≫(479쪽), ≪헨리 키신저: 외교의 경이로운 마법사인가 아니면 현란한 곡예사인가?≫(843쪽), ≪오토 폰 비스마르크: 천재-정치가의 불멸의 위대한 리더십≫(491쪽)을 출간했다. 그리고 저자의 일종의 지적 자서전으로 ≪내 저서의 서문들≫(223쪽)을 출간했다.

저자 서문

제1장 프롤로그(Prologue): 혁명과 전쟁
제2장 나폴레옹의 교육과 자율학습
제3장 위장된 축복: 실패한 혁명가
제4장 원정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얻다
제5장 군사 쿠데타로 제1통령이 되다
제6장 알프스산을 넘어서: 마렝고(Marengo) 전투
제7장 나폴레옹 법전(the Code Napoleon)의 창제
제8장 암살위협을 넘어 종신 통령(the Consul for Life)으로
제9장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1세(Napoleon I)로 등극
제10장 나폴레옹 군사전략의 절정: 오스트리아-프러시아 동맹국들과 전쟁
제11장 역사의 종말: 프러시아와 전쟁
제12장 나폴레옹의 대륙체제(the Continental System) 정책과 프러시아-러시아 연합국들과 전쟁
제13장 나폴레옹의 “궤양”(the Ulcer): 스페인
제14장 러시아와 동맹 수립과 오스트리아와 전쟁
제15장 나폴레옹 권력의 절정과 후계자의 생산
제16장 나폴레옹의 오만(Hubris): 러시아의 침공
제17장 러시아 동장군(General Winter)의 저주(Nemesis)
제18장 나폴레옹과 유럽 연합군의 결투: 라이프치히(Leipzig) 전투
제19장 나폴레옹의 몰락: 연합국의 파리점령
제20장 불사조 나폴레옹의 마지막 도박: 워털루(Waterloo)의 결판
제21장 피날레: 그리스의 비극(A Greek Tragedy)
제22장 나폴레옹 리더십의 비결과 덕목
제23장 나폴레옹의 역사적 유산(Legendary Legacy)
제24장 에필로그(Epilogu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약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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