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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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조전
신간
일본육군조전
저자
조필군
역자
-
분야
군사학
출판사
박영사
발행일
2021.08.30
개정 출간예정일
페이지
476P
판형
신A5판
ISBN
979-11-303-1281-1
부가기호
94390
강의자료다운
-
정가
25,000원

초판발행 2021.08.30


Ⅰ.
1881년 4월 초부터 윤(閏)7월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하기 위한 조선의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일명 ‘紳士遊覽團’)은 12명의 조사(朝士)와 27명의 수행원(隨員), 10명의 통역관, 13명의 하인, 그리고 2명의 일본인 통역 등 총 64명의 규모였다. 조사들은 당시 거세게 전개되었던 ‘위정척사운동’의 예봉을 피해 비밀리에 파견되었던 점에서 공식사절이 아닌 일종의 비공식 견외사절이었으며, 일종의 특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정부가 택한 비공식적인 행보는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얻는 제한적인 정보 외에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자료를 얻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조사들은 고종에게 복명시 일본을 시찰한 결과를 ‘문견사건(聞見事件)’이라는 제목의 서계(書啓)로 작성하였고, 출발에서부터 귀국에 이르는 여정을 부록 형태의 별단(別單)으로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이처럼 보고서는 서계에 해당하는 문견사건류 보고서와 별단에 해당하는 시찰기류로 구분할 수 있다.
『고종실록(1881.2.10.)』에 의하면, 메이지 정부의 각 성(省)의 업무 파악을 위해 떠난 조사들과는 달리 이원회(李元會)는 무기제조를 비롯한 총 · 포 · 선박을 살피는 일과 관련한 업무를 맡았다. 1881년 1월에 이원회는 암행어사로 명을 받았고 도중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획관(參劃官) 임무로 변경되었지만 동년 2월 15일 경 참모관 이동인(李東仁)의 실종으로 인해 다시 조사신분으로 복귀하여 시찰단에 합류하였다. 군사제도와 무기 등 근대식 군대의 양성이 당시 조선정부의 최대 관심사였다는 점은 조사시찰단 귀국 후 12명의 조사들 중에서 8명이 통리기무아문의 당상으로 임명되었고, 이원회와 홍영식(洪英植)을 군무사(軍務司)의 당상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은 조선의 조사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이 원회가 시찰기로 정리하여 고종에게 보고한 4책 6권의 책자이다. 이 책 은 보병, 기병, 포병, 공병, 치중병 등 5병의 병종별 단위부대 편성 방법 과 신병훈련 방법, 병종별 전투대형과 전술 그리고 체조교련 등 일본의 근대적 부대편성과 훈련 및 전법에 관한 자료를 수행원과 일본측 통역관 들의 도움을 받아 한문으로 번역하여 작성하였다. 이 책은 일본육군사관 학교의 전신인 병학료(兵學寮)에서 1870년에 프랑스 군사교범을 번역하여 발간한 『陸軍日典』과 이 책을 기초로 하여 프로이센과 네덜란드의 예를 참고하여 1872년에 편찬한 『步兵內務書』, 그리고 육군성에서 발간한 『步兵敎範』 등 여러 군사훈련교범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 은 근대 군제에 대한 한국 최초의 조사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자는 필사본으로 제1책에 제1 · 2권, 제2책에 제3 · 4권, 제3책에 제5권, 제4책 에 제6권이 각각 실려 있고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이원회는 무관 출신으로 1864년(고종1년)부터 1868년 까지 선전관 · 금위영천총, 승정원의 동부승지 · 좌부승지, 좌 · 우승지, 그 리고 태안부사를 역임하였다. 1872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1881년 초 조선의 일본시찰단에 참획관으로 참가하였고, 동년 11월 통리 기무아문의 군무사 당상경리사에 임명되어 조선 말기 근대식 군대의 기 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책의 목차는 제1권 군제총론(軍制總論), 제2권 보병훈련교범 도설 및 도식(步兵操典圖說 · 圖式), 제3권 기병훈련교범(騎兵操典), 제4권 포병훈 련교범 · 공병훈련교범 · 치중병편제(砲兵 · 工兵操典 · 輜重兵編制), 제5권 보 병신병훈련교범(步兵生兵操典) 및 체조교련(體操敎練), 제6권 기병신병 교 련 및 포병신병 교련(騎兵 · 砲兵生兵敎練)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책 제 1권(군제총론)에서는 근위국과 육관진대의 군제 및 삼비법식, 교도단 · 사 관학교 · 유년학교 · 도야마학교 등 규칙, 보병 · 기병 · 포병 · 공병 · 치중병 등의 편성규칙, 군악대 규칙, 군용전신, 나팔 신호, 작은 피리 신호, 군기의 편성, 휘장, 기계, 개인 배낭 등을 수록하고 있다. 제1책 제2권(보병훈련교범 도설 및 도식)에서는 보병 소대로부터 대대까지의 제대 편성과 훈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2책 제3권(기병훈련교범)에서는 기병소대로부터 대대까지의 편성과 훈련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제2책 제4권(포병훈련교범 · 공병훈련교범 · 치중병편제)에서는 포병소대를 중심으로 승마부대의 편성과 훈련에 대해 설명하고, 개인 참호로부터 갱도구축, 교량제작, 야전축성과 지뢰의 매설 및 운용, 토지측량 등 공병의 편성과 훈련에 대해서 설명한 후 치중병 편제는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제3책 제5권(보병신병훈련교범 및 체조교련)에서는 보병신병 훈련에 관한 사항에 비중을 두고 일반규칙과 산개시 교련의 요령 및 체조교련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제4책 제6권(기병신병 및 포병신병교련)에서는 보병신병에 준한 기병 · 포병의 신병훈련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 『일본육군조전』은 홍영식의 『일본육군총제』와 함께 1881년 이후 추진한 일련의 근대적 군사조직과 군사정책 등 근대 군제사(軍制史)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군 군사교리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술연구 자료로서 그 활용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Ⅱ.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이 국민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본군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군대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적 군사체제로 전환하게 된 데에는 초대 병부경을 역임하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懸有朋)의 역할이 컸다. 그는 메이지 유신 직후 독일 등의 군사체제를 시찰하고 귀국 직후인 1873년에 구 사무라이 계급의 반발을 무릅쓰고 징병제를 강행했다. 이처럼 국민개병에 입각한 병역제도를 운영하고 전국을 6개의 군관구로 나누어 군관구별로 진대(鎭臺)를 설치하여 예하 부대를 관할하는 체계를 구비하였다. 징병령을 내려 국민들을 징집 하고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으로 이어지는 엘리 트 코스를 거친 고위 군인들이 군부를 장악하여 제국주의의 야망을 실현 하고자 했다. 1881년 당시 일본은 프로이센(Preussen)의 군제를 수용하여 전시 병력동원 체제를 갖추고, 사단, 여단, 연대, 대대, 중대, 소대로 편 성되는 편제 형태를 수용하여 군대의 훈련과 장비 및 전법 면에서 근대 적 군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 군대의 지휘체계는 육 군성에서 전체적으로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군정기관인 육군성과 군령 기관인 참모본부, 군령집행기관인 감군본부로 분리되어 운영되는 3원적 체제였다. 1888년에 전통적 부대편제였던 진대제(鎭臺制)를 폐지하고 사 단 편제를 채택하여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7개 사단, 14개 보병연 대, 7개 포병연대 등 근대적 육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한편 140년 전 당시 조선왕조는 서구 열강과 청 · 일의 침략에 직면하 여 국가 존립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당시 조선은 1879년 12 월 21일 군무사와 군물사 등 12사를 거느린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부 국강병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즉 국방력 강화를 위한 군제개혁의 모델과 무기의 도입선을 청국과 일본 양국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 가? 하는 점과 인천 개항에 따른 쌀 가격의 급등시 민란을 저지할 치안 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그리고 통리기무아문을 운영할 인재와 포 함(砲艦) 구입 등 부국강병에 소요되는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하 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른 일련의 조치로서 고종과 개화 정책 추진세력은 국방력과 치안력의 강화를 위해 조사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교련병대(속칭 ‘별기군’)를 창설하여 일본교관에게 군사훈련을 위촉하게 하는 동시에 청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무기제조기술 등 군사 기술을 배워 오게 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 을 확대하려는 목적하에 조사시찰단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조사원들은 1881년 4월 11일(양력: 5월 8일) 쓰시마(對馬島)에 도착한 이후 윤 7월 1일 나가사끼(長崎)에서 귀국선에 오르기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일본의 육군성, 참모본부, 감군본부, 육군진대, 사관학교, 유년학교 등 각종 군사편제 기구 및 군사시설과 각급 군사학교를 비롯하여 포병공창과 화약제조소, 조선소 등 군수산업시설 등을 폭넓게 조사하였다. 이처럼 조선정부는 일본에 1881년 조사시찰단을 파견함으로써 메이지 일본의 근대적 군사제도를 포함한 일련의 서구식 제도를 수용하고자 했다. 고종은 홍영식과 이원회에게 일본의 육군성 사무와 육군의 훈련체계에 대해 파악하도록 임무를 부여하고, 통리기무아문 산하에 설치된 군무사와 군물사 등 관련 부서의 운영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게 하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군제 근대화의 모델로 전통적인 군제를 유지하면서 서구의 무기만을 수용하는 중국식보다는 무기만이 아닌 군제 자체의 서구화를 도모하는 일본식 모델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Ⅲ.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사에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일본의 정치 · 외교 · 군사 상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고자 했던 조선정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조사시찰단이 남긴 문헌 중 일본의 군제에 관한 자료들은 첫 번째로 이원회의 『일본육군조전』과 홍영식의 『일본육군총제』이고, 두 번째로 이원회의 수행원인 송헌빈(宋憲斌)이 포병공창, 탄환제조소 등 군사시설의 시찰을 통해 군사기술 관련 정보를 수집하여 작성한 『동경일기』이다. 세 번째로는 박정양 · 엄세영 · 강문형 · 민종묵 · 조준영 · 심상학 등 조사들의 문견사건류의 보고서들이다. 이러한 조사시찰단의 보고 자료들은 조사시찰단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1880년대 당시 조선왕조 위정자들이 일본과 일본의 실정 전반을 통해서 서구 문물에 대해 가졌던 인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일본육군조전』 역시 군사 분야에 대해 가졌던 당시 조선정부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 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사시찰단원들에게 일본의 근대적 군제는 조선의 군제와 비 교할 때 큰 차이가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조사들은 일본의 근대 군제 의 시찰을 통해서 일본의 군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생각되 며, 메이지 정부의 성과에 고무되어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을 구상하고 일본의 근대 군제를 조선 근대 군제개혁의 모델로 수용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로 통리기무아문 산하 군무사(司) 밑에 총무국, 참모국, 교 련국을 두었고, 각 국(局) 마다 색(色)을 예하에 두고 있었다는 점은 일본 육군성의 체제인 성(省) · 국(局) · 과(課)를 참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조사시찰단원들이 일본 시찰을 통해 입수한 지식과 정보는 견문기와 시 찰기에 수록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조선 정부의 군사정책과 추진에 결정 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군제개혁을 하는 데 이원회 와 홍영식은 각각 군무사의 당상경리사와 부경리사로 활약하였다. 그러 나 조사시찰단의 일본 파견 결과로 촉발된 이러한 군제개혁의 노력은 임 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무산되어 근대적인 조선군제의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 책 『일본육군조전』은 대한제국에서 『보병조전』을 발간할 때 기초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책은 대한제국시기와 그 이 후 독립군으로부터 한국군에 이르기까지 군사훈련 내용을 비교하여 연 구할 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대한제국시기에 발간한 『보 병조전』과 신흥무관학교의 『신흥학우보』, 북로군정서의 『독립군간부 훈 련교본』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발간한 『보병조전초안』에 이르기까 지 독립군의 군사교육훈련 교재와의 관련성과 창군 초기의 군사교범과 의 연계성에 관한 비교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도 이 번역 책자가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육군조전』은 최초의 근대 군제 와 군사기술에 관한 조사보고서라는 가치뿐만 아니라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군 군제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군사 분야를 담당한 이원회와 그 일행들은 어떤 생각으로 일본을 갔을까? 일본의 군사서적 자료를 수집하여 필사하면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아마도 일본처럼 시급히 군사 분야를 마련하고자 하는 벅찬 꿈으로 가득차지 않았을까?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는가! 급변하는 오늘날의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를 돌아볼 때 또다시 위기가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은 어디에서도 그 논리를 찾을 수 없다. 1881년 조선의 조사시찰단이 일본에 파견되기 바로 100여 년 전에 이미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1795년)』를 통해서 일본이 네덜란드로부터 홍이포(紅夷砲)와 같은 무기를 도입해 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할 경우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면서 강한 이웃인 일본을 경고한 바 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이러한 18세기 말의 이덕무의 통찰력을 당시의 조사시찰단원들이 되새겼더라면 일본의 군사정책과 대외전략을 좀 더 깊이 파악하고 일본의 침략을 예측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에 대해 많이 늦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 책의 번역은 사막에서 모래알만큼이나 작은 일이지만, 1세기 이전 한반도의 위기 상황에서 행해진 선각자들의 행보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시금석(試金石)이 되기를 희망하며, 국군의 군사교리 변천 연구를 하는데 그 가치와 의의를 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1년 7월
옮긴이 씀

옮긴이 조필군

현 광주대학교 교수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군사사학적 연구-청산리 전역을 중심으로(2011)
항일무장독립군군사교범 『보병조전초안』의 현대적 해석과 군사사학적 함의(2018)
만주지역 독립군 군사교육 자료의 현대적 해석과 함의(2017) 외 다수

일러두기
해제

Ⅰ. 군 제 총 론

Ⅱ. 보병 훈련교범 도설 및 도식
1. 보병 훈련교범 도설
2. 보병 훈련교범 도식

Ⅲ. 기병 훈련교범
1. 승마 소대학과 도식
2. 승마 대대학과 도식

Ⅳ. 포병과 공병 훈련교범, 치중병 편제
1. 포병 훈련교범
2. 공병 훈련교범
3. 치중병 편제

Ⅴ. 보병 신병훈련 교범
1. 제1부: 일반규칙과 구분
2. 제2부: 산개시 교련의 일반적인 요령
3. 체조교련

Ⅵ. 기병 신병 및 포병 신병의 교련
1. 기병 신병의 교련
2. 포병 신병의 교련

부록 1 원문자료 제1책
부록 2 원문자료 제2책
부록 3 원문자료 제3책
부록 4 원문자료 제4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