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6. 9. 14
27년 전의 나에게 주고 싶은 책
1994년 봄, 충남 대산. 현대석유화학 대산공장
1992년, 나는 인하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를 졸업했다. 배를 설계하는 법을 배웠고, 재료역학과 유체역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 현대그룹 공채에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충남 대산의 현대석유화학 대산공장 공무팀이었다. 공무팀은 수백 대의 펌프, 압축기, 열교환기, 배관 등 공장 설비를 관리하는 팀이다. 공장이 멈추지 않도록 설비를 점검하며, 고장이 나면 수리하고, 정기 보수 일정을 관리한다. 엔지니어의 세계였다.
나는 그 세계가 좋았다. 도면을 펼치고, 설비 앞에 서서, 손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 현장은 살아있었고, 문제가 눈에 보였으며, 해결하면 바로 결과가 나왔다.
4년이 흘렀다.
어느 이른 아침 출근 길, 정문을 들어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장이 작아 보인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산공장은 분명 큰 공장이었다. 광활한 바다를 메워 뻘 위에 콘크리트 파일을 박고 다시 그 위에 공장을 지었다. 하지만 4년을 같은 설비, 같은 공정, 같은 문제 앞에서 보내다 보니 나는 이미 이 공간의 끝을 알고 있었다.
더 넓은 곳이 있을 것 같았다. 더 복잡한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 선배가 말했다.
“구매 쪽은 어때? 거기는 공장 밖을 봐야 해. 세상이 달라.”
전환 - 공장 밖의 세계
솔직히 처음에는 망설였다. ‘구매팀? 물건 사오는 부서 아닌가. 도면 대신 발주서, 설비 대신 공급사 목록 등 엔지니어로서 쌓아온 것들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구매로 직무를 전환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얼마나 좁은 생각이었는지를.
구매는 공장 밖의 세계였다. 공급사를 만나고, 시장을 읽고, 계약을 협상하고, 납기를 추적하고, 비용을 설계하는 일 등 공무팀에서 익힌 설비 지식은 오히려 강점이 됐다. 공급사가 제시하는 기술 사양을 직접 읽을 수 있었고, 납기 지연의 원인을 현장에서 바로 진단할 수 있었다. 엔지니어 출신 구매 담당자는 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구매의 진짜 무게를 실감하게 됐다.
깨달음 - 발주서 한 장의 무게
유럽의 복합화력발전소 EPC 프로젝트. 핵심 설비인 가스터빈(GTG) 패키지의 납기가 4개월 지연됐다. 무려 4개월이었다.
그 4개월이 공사 전체를 멈춰 세웠다.
발주처의 지체보상금(LD) 청구가 날아왔다. 수백 명의 현장 인부가 손을 놓았다. 크레인 임차 비용이 하루하루 쌓였다. 후속 공정이 연쇄적으로 밀렸다. 단 하나의 구매 결정 - 공급사 선정 당시 납기 조건 하나 - 이 수백억원의 손실로 이어졌다.
나는 그 현장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발주서 한 장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구나.’
반대의 경험도 있었다. 대형 화학 기업 근무 당시 핵심 설비의 공급선을 다변화해 원가 20%를 절감했을 때, 그 절감액이 영업이익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한 부품제조 기업에서 SCM을 혁신해 재고 자산 22%를 줄였을 때, 수십억원의 현금이 회사로 돌아왔다.
구매 담당자 한 명의 전략적 판단이 회사의 재무제표를 바꿀 수 있다. 나는 이것을 27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목격했다.
그렇게 나는 구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27년의 기록
대산공장 공무팀 엔지니어에서 시작해, 나는 다섯 개 산업을 넘나들었다.
플랜트 · EPC에서 연간 최대 13조 원의 글로벌 조달을 총괄했다.
GE, Siemens, Arconic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 협상 테이블을 마주했다. 동남아시아 · 중동 · 북아프리카 · 동유럽을 비롯한 15개국 이상의 현장에서 조달을 책임졌다. 2차전지 · 자동차유리 · 항공부품 · 화학 플랜트를 거치며 구매 실무자부터 관리자를 거쳤다.
이 책은 그 27년의 기록이다.
화려한 이론서가 아니다. 대산공장 설비 앞에서 배운 것, 유럽의 현장에서 뼈저리게 배운 것, 동남아시아의 협상 테이블에서 밤새워 익힌 것들이다. 모든 이론과 프레임이 실제 현장에서 검증된 것들이다.
이 책을 읽을 세 종류의 독자에게
이 책은 세 종류의 독자를 위해 썼다.
첫째, 구매 실무자.
이제 막 구매 업무를 시작한 신입사원부터, 10년 경력이지만 ‘체계’가 없다고 느끼는 중견 담당자까지. 1994년의 나처럼 구매 앞에 서 막막한 사람들에게 이 책이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 구매팀장 · CPO.
팀을 어떻게 이끌고, 경영진에게 어떻게 구매의 가치를 증명할 것인가. 이 책의 2부와 3부가 그 답을 담고 있다.
셋째, 구매팀과 협업하는 사람들.
엔지니어링팀, 재무팀, 경영진. 구매가 무엇을 하는 팀인지, 어떻게 함께 일해야 가장 큰 성과가 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쓰면서 하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다.
“1999년의 나에게 이 책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 담겨 있다.
대산공장 공무팀에서 시작해 구매로 삶을 바꾼 한 엔지니어의 27 년이, 여러분의 구매 여정을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전략적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나는 구매를 선택하지 않았다. 구매가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된 일이었다.
발주서 한 장이 회사의 운명을 바꾼다. 그것을 아는 구매 전문가가 되기를 바란다.
김우진
CPSM | 27년 구매 전문가
저자 소개
김우진
CPSM(공인 공급관리전문가).
제조 · 화학 · 자동차 · 항공 · EPC 플랜트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구매 담당자 · 팀장 · 본부장으로 27년간 일했다.
GE · Siemens 등 글로벌 OEM과의 직접 협상, 15개국 이상의 글로벌 조달 현장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제조 및 화학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에 재직 중이며,
기업의 구매 전략 · 협상 · SCM 혁신을 주제로 강의와 자문 활동을 하고 있다.
Part 01 구매 전략 & 이론- 구매를 보는 눈을 키워라
Chapter 01 구매의 본질
― 비용 센터에서 전략 파트너로 3
Chapter 02 카테고리 전략과 포트폴리오 분석
― 크랄릭 매트릭스 실전 적용 11
Chapter 03 TCO(총소유비용) 사고법
― 단가만 보면 망한다 21
Chapter 04 CPSM이 말하는 공급관리 전략의 핵심
― 103개 Tasks에 담긴 글로벌 공급관리 프레임워크 31
Chapter 05 산업별 구매의 특성 이해
― 플랜트 · 제조 · 자동차/항공 · 화학, 무엇이 다른가 45
Part 02 실무 프로세스 가이드- 발주서 한 장도 전략이다
Chapter 06 구매 프로세스 전체 사이클
― RFQ → TBE/CBE → PO → 납기관리까지 59
Chapter 07 RFI/RFQ/RFP 완벽 작성법
― 세 문서의 차이를 알면 구매가 달라진다 71
Chapter 08 TBE/CBE 실전 가이드
― 평가표 작성, 점수 산정, 그리고 협상 활용까지 83
Chapter 09 계약서 핵심 조항 읽는 법
― Commercial Term Sheet부터 불가항력 조항까지 93
Chapter 10 ERP 기반 구매 프로세스 표준화
― 시스템을 손에 익히면 구매 생산성이 달라진다 105
Chapter 11 수입통관 실무
― HS코드, 관세, 선적서류 완전정복 119
Chapter 12 구매 KPI와 성과 보고 체계 만들기
― 숫자로 말해야 구매팀의 위상이 높아진다 133
Part 03 협상 & 공급업체 관리- 관계가 곧 원가다
Chapter 13 협상 준비의 기술
― 정보가 협상력이다 147
Chapter 14 글로벌 OEM 협상 실전
― 글로벌 기업들과 싸우는 법 157
Chapter 15 LTA(장기 공급 계약)로 원가를 고정하라
― 매년 싸우지 말고, 구조로 이겨라 167
Chapter 16 공급선 다변화 전략
― 독점을 깨야 가격이 움직인다 179
Chapter 17 SRM 전(全)주기 운영
― 발굴 · 평가 · 계약 · 성과관리, 공급사를 자산으로
만드는 법 191
Chapter 18 재고자산 22% 절감을 이룬 SCM 혁신 이야기
― 창고의 먼지를 현금으로 바꾼 1년의 기록 203
▶ 에필로그 ― 구매 전문가로 27년을 버티는 법 214
▶ 부록 ― 실무 서식 모음
(현장에서 바로 쓰는 구매 실무 양식) 217
▶ 참고문헌 및 자료 인용 목록 234
▶ 색인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