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6. 7. 30
추천의 글
지도교수로서 제자의 연구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늘 특별한 경험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처음부터 더 특별했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큰 조직을 이끄는 최고 경영자로서 이미 산업 현장에서 검증된 경력을 쌓아온 그가, 38년의 실전 경험을 학문적 언어로 승화시키고자 교수-제자의 연을 맺기를 청했을 때가 떠오른다. 평범한 교수로서 이토록 과분한 제자를 지도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사 과정을 지도하면서 저자가 써 낼 글은 단순한 경영서가 아닐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영서는 현장의 경험을 검증 없이 나열하거나, 반대로 이론의 늪에 갇혀 현실과 멀어지는 두 가지 함정 중 하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경영학의 여러 이론과 모델들을 단순히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종합상사’라는 고유한 기업 맥락 위에서 그 이론들을 재구성하고, 자신이 몸소 겪은 거래와 투자, 사업 운영의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이론의 유효성을 검증하고 있다. 이는 오랜 실전 경험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며, 동시에 치열한 학문적 훈련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결과물이다. 매우 드물지만 학문과 실무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는 경영서들이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의 핵심 통찰은 명쾌하다. 연결의 총량이 경쟁력이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로 대표되는 복합 위기의 시대에 한국형 종합상사의 다음 경쟁력은 병목이 형성되는 지점을 남보다 먼저 읽고 그 위에 규칙 · 자본 · 운영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서 나온다. 저자는 이 명제를 단지 선언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LEAP×3S>라는 정교한 전략 프레임워크로 구체화했다. 최고 경영자로서의 중책과 연구자로서의 엄격한 학문적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박사 학위 논문과 이 귀한 책을 완성해 낸저자의 지적 성실함과 집요함이 이 책의 모든 페이지에 녹아 있다. 한국 산업이 짧은 시간 안에 세계적 경쟁력을 압축적으로 만들어 온 역사를 저자만큼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역사의 다음 장을 어떻게 써 나가야 하는지를 이렇게 체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 책은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의 전략가와 실무자에게는 즉각 활용 가능한 인사이트를,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을 연구하는 학자와 연구자들에게는 이론과 현장이 교차하는 풍부한 사유의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부디 이 특별한 책이 경영계를 넘어 더 넓은 독자와 만나기를 기대한다.
서강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장영균
머리말
종합상사에서 38년을 보내는 동안 거듭 확인한 것이 있다. 위기는 더 이상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곳의 충격은 어김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붙었고, 그렇게 얽힌 위기는 한 변수씩 떼어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가 유독 다루기 어려운 이유도, 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먼저 드러났다.
그래서 충격 하나하나에 쫓기기보다, 변화가 어떤 순서로 손익과 투자와 운영에 번지는지를 먼저 읽으려 했다. 이 책은 그 전이의 질서와 대응 원리를 정리해 보려는 시도다. 충격이 규칙에서 자본으로, 다시 운영으로 옮겨가는 경로를 먼저 읽어 내는 데서 전략의 순서가 정해진다.
이 책은 두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썼다. 하나는 종합상사와 글로벌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전략과 투자, 사업을 책임지는 임원과 실무자다. 다른 하나는 종합상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직장인과 연구자다.
앞의 독자에게 건네고 싶은 것은 불안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다. 어디에서 수익이 생기고 무엇을 먼저 갖춰야 하는지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뒤의 독자에게 드리는 기대도 비슷하다. 종합상사를 오래된 무역 중개업의 연장으로 볼 것인지, 규칙과 자본과 운영을 한 몸으로 엮어 가치를 만드는 기업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달리 읽힐 것이다.
현장에서 보낸 그 시간을 다시 경영학 연구의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이 책의 LEAP×3S 프레임워크는 그 과정에서 쓴 논문의 결론을 현장의 언어로 옮긴 것이다. 연구와 현장을 오가며 새삼 실감한 것은, 한국 산업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세계적 경쟁력에 닿았는가였다.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와 방위산업, 철강이 그 증거다. 우리 기업은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았고, 어떤 분야에서는 스스로 길을 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던지는 질문이 달라졌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끝까지 붙들 것인가. 연결을 업으로 삼아 온 종합상사에게 이 질문은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연결 그 자체가 희소한 능력이던 시대가 빠르게 저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연결의 양이 아니라 통제의 깊이에서 판가름 난다.
한국의 종합상사는 우리 산업이 도약하던 시기에 세계로 나가는 통로이자 전초기지로 출발했다. 일본 상사나 글로벌 트레이더와 견주면 출발선의 차이는 분명했다. 그들은 더 긴 시간에 걸쳐 자본을 쌓고, 포트폴리오를 여러 경기순환 속에서 두텁게 다져 왔다. 우리는 훨씬 짧은 시간에 압축적 진화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제 연혁의 차이만으로 현재와 미래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현장에서 거듭 확인한 것도 그 지점이었다. 성과를 가른 것은 연결의 숫자가 아니었다. 현금과 가치가 어느 경로로 움직이는지를 읽고, 위험을 어디에 둘지 판단하며, 여러 이해관계자를 실제로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규모에서 앞선다고 늘 민첩한 것은 아니며, 한국 종합상사의 기회도 바로 그 틈에 있다.
관건은 그 기회를 한 번의 실적으로 흘려보낼지, 구조적 우위로 굳힐지에 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병목이 생기는 지점을 먼저 읽고, 무엇을 직접 통제할지 판단하는 일이다. 물론 소유가 답인 국면도 있다. 다만 핵심은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소유에 앞선 통제의 설계다.
이 책은 종합상사의 역사를 정리하거나 사업을 나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성공 공식을 정답처럼 되풀이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질문은 하나다. 한국 종합상사는 어떤 질서 위에서 다음 수익 구조를 세울 것인가. 에너지 전환과 자원 안보, 공급망 재편, 식량과 물, 기후 위기, 고령화, 기술 격차, 데이터 주권은 이미 구조 전환의 조건이 되었다. 이제 종합상사에 ‘다음 시장’은 새로운 품목이나 지역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서 병목이 형성되는 지점을 남보다 앞서 가려내고, 그 자리를 선점하는 일이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연결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한 번의 성과보다, 그 성과가 반복되도록 구조를 짜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 구조가 다음 도약의 발판으로 다시 작동할 때, 비로소 그것이 기업의 실력이다. 종합상사의 미래는 결국 그 축적의 방식에서 갈린다.
앞으로의 종합상사는 통제의 깊이와 작동 범위로 경쟁할 것이다. 한국종합상사의 기회도 바로 거기에 있다. 플래닛 와이드(Planetwide)라는 이름에 담고자 한 뜻도 그것이다.
이계인(李啓仁. Lee, Kye-In)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졸업(경제학사)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졸업(경영학 석사)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졸업(경영학 박사)
현, (주)포스코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사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글로벌마케팅위원장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통상위원장
차례
PART 1 좌표의 재설정: 추격에서 도약으로
Chapter 1 브로커의 쇠퇴, 오케스트레이터의 부상
Chapter 2 복제로는 따라잡지 못한다: 경로 의존성의 함정
PART 2 LEAP: 판을 바꾸는 네 개의 동력
Chapter 3 거래를 자산으로 바꾸는 세 단계
Chapter 4 L(선도적 동적 역량): 변화를 앞서 읽는 힘
Chapter 5 E(생태계 가치 네트워크): 데이터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Chapter 6 LEAP×3S: 병목을 읽는 지도
PART 3 경쟁의 판과 통제레버
Chapter 7 일본 종합상사: 강점을 인정하되 빈틈을 읽어라
Chapter 8 듀얼 엔진(Dual Engine): 시스템 트레이딩과 그린 자산의 결합
Chapter 9 초크 포인트(Choke Point): 소유 없이 통제하는 전략
PART 4
전환의 결합: 비즈니스 모델 혁신과 목적 지향 ESG & SVC
Chapter 10 A(고도화된 BMI): 파이프라인에서 플랫폼으로
Chapter 11 P(목적 지향 ESG & SVC): 규제를 수익으로 바꾸는 법
Chapter 12 트윈 트랜스포메이션: 디지털과 그린이 서로를 키운다
PART 5 조직과 리더십
Chapter 13 양손잡이 조직: 효율과 혁신의 결합
Chapter 14 오케스트레이터 리더십: 지시하지 않고 설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