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판발행 2025.12.15
초판발행 2024.08.21

책머리에
인생 최초의 여행은 언제였을까? 까마득한 옛날의 희미한 기억한 장을 꺼내본다. 그건 세 살 때로 추정되는 어느 날 엄마와 언니들과 같이 아랫동네로 나들이 간 기억이다. 생애 최초의 기억으로 보관된 장면이 집 바깥으로 외출한 것이니 바깥 세계의 새롭고 낯선 장면과 얼굴들이 두세 장의 이미지로 저장되었나 보다.
그 후 여행다운 여행이라면 20대에 처음으로 독일로 갔던 때이다. 스무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는 첫 외국여행이었는데 당시의 독일은 얼마나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던지! 독일어와 독일문화를 수업을 통해 전달하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지금도 독일의 공항과 도시들, 길과 공원들, 낯설었던 사람들에 대한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때와 장소의 무수한 이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같은 일의 반복인 듯하면서도 느닷없이 새롭고 낯설기도 하다. 친숙한 또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익숙하다고 여겨온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 기후를 비롯한 삶의 여건들이 예기치 않게 달라지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의 삶은 여행적 요소들로 가득 채워진다. 특별히 기획한 장거리 여행이나 짧은 떠남, 가벼운 나들이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그 자체가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한 정착지가 없는 인간은 항상 길 위에 있으며, 그래서 삶의 여정은 여행에 비유된다.
이 책은 괴테와 릴케, 카프카와 헤세에서 율리아 쇼흐나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같은 비교적 젊은 작가까지 독일어권 작가들의 실제 또는 문학 속 여행을 담고 있다. 그들은 일상의 틀을 벗어나 과감하게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면서 현실의 이면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제시한다. 여행은 자아와 타자 간의 활발한 대화이며, 여행문학은 여행하는 사람의 내면의 눈으로 외부 세계를 그려내는 문학 장르라는 것을 그들의 글이 증명한다.
필자는 십여 년간 독일어권의 여행문학을 읽고 그 특징적인 면들을 알아내는 작업을 연구주제로 삼아왔다. 다양한 작가들의 여행과 그 문학적 성과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으나 작가마다 다른 방식의 여행과 문학화에서 이론적인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공통된 특징이라면 익숙한 삶의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열린 시각과 낯선 세계에 다가가서 체험과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자기 삶과 문학창작의 다른 단계로 들어서고자 하는 작가정신이다. 그래서 ‘독일어권 여행문학론’이라는 대주제하에 그동안 썼던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는 작업을 기획하게 되었다. 18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독일문학사의 주목할 만한 여행문학 텍스트들을 한 곳에 엮어, 시대인식과 현실감각이 다른 작가들의 여행경험과 여행 관련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간접 체험의 집중도와 텍스트 이해의 통찰력을 높일 수 있기를 희망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서 작업은 일차적으로 연구의 수행자인 필자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독일어권의 여행문학에 관심을 가진 다른 연구자들이나 일반 독자들에게도 연구와 독서의 동기를 부여해서 더 나은 후속연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필자로서 매우 기쁘겠다. 여행지 안내글과 여행후기가 넘쳐나지만 여행문학 장르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성찰, 보다 깊은 독서는 드물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책의 구상과 기획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으나 착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그냥 흘러가던 중에 주위 선생님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마침내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먼저, 책의 형태로 출간될 수 있도록 출판사를 섭외하고 편집과 북디자인 과정에 세세한 조언을 해주신 김미영 선생님, 전문편집인의 능력을 발휘해주신 박은경 선생님, 북디자인을 맡아서 애써주신 정은영 선생님, 원고 정리와 교정에 도움을 주신 전유정 선생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행작가들의 모습을 삽화로 제작해준 딸 이하리의 애정어린 기여에도 고마움을 표한다. 끝으로, 외국문학 연구서의 출판이 쉽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도서출판을 결정해주신 ㈜박영사의 안상준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다시 새로운 여행을 꿈꾸며
2024년 여름
신혜양
신혜양
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했다. 뮌헨의 괴테-인스티투트 본부에서 ‘독일어교수자양성과정’을 이수했으며,
『헤르만 브로흐의 소설과 소설이론 연구』로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한독일문화원 전임강사를 역임하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헤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독
여성문학론』(공저, 1999), 『독일어권 문화 새롭게 읽기』(공저, 2001) 등이 있고, 공동
번역서로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2008), 『베르길리우스의 죽음』(2012), 『강철
폭풍을 뚫고』(2024) 등이 있다.
차례
책머리에 5
1 독일어권 여행문학 11
2 자아형성과 창작 여행 41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43
루 살로메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러시아 여행 59
3 관점의 틀을 깨는 작가의 여행 79
프란츠 카프카의 유럽 여행 81
헤르만 헤세의 인도 여행 99
4 독일 68혁명 세대의 여행 121
독일 68세대와 여행 123
베른바르트 페스퍼의 유럽 여행 129
롤프 디터 브링크만의 로마 여행 141
5 문화교류 여행과 창작 155
독일과 프랑스 간 여행자 교류와 여행산문 157
‘문학수도 베를린’의 신세대 장소성 181
디아스포라의 과거, 바바라 호니히만의 뉴욕 여행 209
6 시대와 현실의 경계를 넘는 문학 여행 237
상상으로 분단의 경계를 넘는 율리아 쇼흐 239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포스트모던 메타역사서술 269
미주 및 참고문헌 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