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교수들의 공동연구의 성과를'서울법대 법학총서'로 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공동연구는 2011년부터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제 그 첫 결과물로서'일제강점기 강제징용사건 판결의 종합적 연구'를 법학총서로 출간하게 이른 것이다. 이번의 공동연구는 일본강점기에 노역을 강제 당하였던 한인노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미수금청구소에 대하여 대법원이 2012년 5월 24일(2009다68620)과 그 후에 국제법, 국제사법, 민사소송법, 상법 및 민법과 관련된 제반 쟁점에 대하여 내렸던 일련의 판결을 그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공동연구의 집필진은 2013년 5월'일제강점기 강제징용사건 판결의 종합적 연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후 서울대학교 법학 제54권 제3호에 원고를 게재하였고, 이제 이를 수정ㆍ보완하여'일제강점기 강제징용사건 판결의 종합적 연구'로 출간하게 된 것이다.
일본강점기에 이루어졌던 한국인 노무자에 대한 강제동원은 지금 세대들에게는 잊혀 진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를 겪었던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한국인 노무자의 동원은 국민징용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든 할당모집과 관알선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든 그것은 일본정부 또는 조선총독부가 관여한 가운에 이루어진 강제적인 동원이었다. 일본은 1937년 7월 중ㆍ일전쟁을 일으킨 후 침략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충원할 필요성이 증대하였다. 드디어 일본은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그 후 이에 기초하여 제반 법령을 제정.공포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자본,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강제동원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 1938년 5월에서 일본패망까지 실행된 할당모집 형태의 강제동원이 있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일본정부의 동원계획을 수용하여 조선에서 모집지역을 선정하고 동원인원을 할당하는 것이었다. 둘째, 일본정부가 직접 실행한 국민징용의 형태의 강제동원이 있었다. 일본정부는 1938년 4월 1일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서 시행하기 위하여 국민징용령을 1939년 10월 1일 제정ㆍ공포하였다. 국민징용은 일본정부가 징용영장을 발행하여 직접 노무자를 강제동원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조선총독부는 국민근로동원령을 통하여 강제동원을 위한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강제동원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셋째, 1942년 2월에서 일본패망시까지 실행된 관알선 형태의 강제동원이 있었다. 관알선이란 그 명칭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사업자나 대행업체로부터 신청을 받고 경찰, 조선노무협회 등의 협력을 받아 실행한 형태의 강제동원이었다. 이상의 강제동원의 실행에는 조선총독부와 그 산하기관인 행정기관 등이 관여하였는데, 대표적인 행정기관으로 내무국 사회과 노무계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매년 조선의 노동력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노무동원계획에 반영하였고, 일본으로부터 동원할 노무자를 접수한 후 조선의 각 도에 업무를 하달하였고 또 행정기관 등을 동원하여 조선의 노무자를 일본으로 수송하는 업무에 조직적으로 관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징용영장의 집행에 응하지 않거나 도피하는 노무자를 경찰을 통하여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일본정부의 통계에 기초하여 학계의 검증을 거친 통계자료에 의하면, 군인과 군무원을 제외한 강제동원된 청장년의 노무자수는 약 104만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광산ㆍ토목공사ㆍ집단농장에 강제동원되어 노예상태의 노무를 하였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한국인 노무자는 노예상태에서 강제노동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임금을 전혀 지급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이유는 매우 다양하였다.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은 일본기업의 기망에 의하여 전혀 임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일본기업은 일본이 패망할 즈음에는 “조선에 돌아가면 나중에 보내주겠다”거나 또는 “예금하여 조선의 가족에게 송부하겠다.”고 한국인 노무자들을 기망하였다. 그리고 일본기업은 노무자가 임금을 지급받으면 조선으로 귀향하여 버릴 것을 염려하여 임금을 강제로 금융기관 등에 예치하게 하고는 기숙사 사감 등을 통하여 이를 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쟁이 종료된 후 일본정부는 연합군사령부(GHQ)의 지시를 받아 일본기업으로 하여금 해당 지역별로 강제동원된 노무자의 미수금을 공탁하도록 하였다. 한편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무자는 일본정부와 일본기업에 의하여 부당하게 임금을 공제 당하였다. 우선 일본정부는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자금통제정책’을 실행하여 노무자의 임금을 관리하였다. 일본정부는 임금의 상한선을 통제하거나 또는 각종 저금과 보험금 등을 임금에서 원천 공제하였다. 또 일본기업은 ‘인신매매적’인 방법으로 수송 과정에서 들어간 비용을 노무자 개인에게 부담하도록 하여 강제동원된 후 1여년 동안에는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일본기업(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되었던 8인의 한국인 노무자가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일본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이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역사적인 중요한 의미를 갖는 승소판결(이하 ‘이 판결’이라고 한다)을 내렸다. 이 판결의 사안에 대하여 이미 일본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원고에게 패소판결을 내렸었다. 따라서 이 사건 판결은 일본최고재판소가 내린 원고패소의 판결을 뒤집는 판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원고들이 일본기업에 대하여 미수금을 청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제법, 국제사법, 민사소송법, 회사법 및 민법 등에서 제기되는 법적 난제를 제거하여야만 하였다. 이 법적 난제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이 사건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법원은 국제재판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국제사법상의 쟁점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이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의 원고승소판결이 있기 전 일본이 내린 원고 패소판결이 먼저 국내판결로서 승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이는 민사소송법상의 쟁점에 해당한다. 셋째,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또 미수금을 지불하지 않았던 일본기업은 1950년 4월 1일 해산되었는데, 그 후 설립된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이 구 일본기업의 지위를 승계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구 일본기업을 대신해서 새로 설립된 일본기업이 구 일본기업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법적 지위에 있는가 하는 쟁점이다. 이는 국제사법상의 쟁점임과 동시에 상법에 관한 쟁점이다. 넷째, 이 사건 원고들의 청구권은 1965년 6월 22일에 있었던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소멸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범위와 효력과 관련이 있는 국제법상의 쟁점이다. 특히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직후 일본은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재산권조치법을 제정ㆍ시행하였는데 이에 의하여 원고들의 일본기업에 대한 청구권은 소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국제법상의 쟁점이라고 할 것이다. 마자막으로 다섯째, 원고의 청구권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소멸시효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민법상의 쟁점이다. 이상과 같은 법률상의 쟁점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 공동연구의 주요목적이다. 결국 이 사건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강제동원이 되었던 노무자에 대한 일본기업의 법적 책임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정부는 종전에 존재하였던 유사한 법을 통폐합하여 2010년 3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법)’을 제정하여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 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급하고 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지원법’은 강제동원된 피해자 중 노무자에 대하여는 일본기업으로부터 지급받을 수 있었던 미수금을 당시의 일본국 통화 1엔에 대한민국 통화 2천원으로 환산하여 노무자 또는 그 유족에게 지급하고 있다(제5조). 그런데 동위원회가 강제동원된 노무자에게 미수금을 지급하는 것은 일본을 대신하여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동위원회가 지원금을 지급하게 되면 일본기업이 미수금지급의무를 면하거나 그 의무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정부는 일제강점기의 ‘과거사정리’라는 국가의 책무의 일환으로서 자국민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강제동원되었던 노무자에게 보상을 실시하는 것일 뿐이지, 결코 일본을 대신해서 미수금을 지급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동위원회는 대한민국정부가 일본정부로부터 인수받은 노무자공탁금자료(조선인노무자공탁금 명부 부본)에 기초하여 피해자의 신청을 받아서 노무자의 미수금에 대한 지원을 실행하고 있다. 그런데 동위원회가 일본정부로부터 인수한 자료는 강제동원 노무자 미수금 사건에 관한 자료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강제 노무자에 대하여 지원금이 지급되기 위해서는 일본이 가지고 있는 미수금공탁서의 공개가 필수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대한민국정부는 2005년 3월 26일 주일본한국대사관으로부터 ‘일제하 한국인 노무동원자 공탁서 부본’ 17만 5천명 분(총 공탁금액 2억 7,800만엔)을 제공받은 후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하여 일본에 관련 자료의 제공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공탁 자료가 없을 경우에는 노무자는 미수금을 확인할 길이 없고 따라서 이 사건에서와 같이 원고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의'서울법대 법학총서'는 박영사가 출판하게 되었다. 박영사의 안종만 회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 이 법학총서가 출간되기까지 어려운 산파역을 맡아주신 조성호 이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편집의 고생스러운 작업을 맡아 성실하게 수행하여 주신 편집부의 한현민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집필진을 대표하여
남 효 순 교수
이 동 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법학박사)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등 역임
現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
개인정보 보호의 법과 정책(2014)(공저) 외 다수
매매계약이 해제된 경우 미등기 매수인이 한 임대차의 운명(민사법학, 2014. 9) 외 다수
천 경 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사법연수원 수료(26기)
미국 듀크 대학교 로스쿨 졸업(LL.M.)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법학석사, 법학박사)
한국 및 미국 뉴욕주 변호사(金.張法律事務所 근무)
現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학전문대학원 조교수
Corporations and Partnerships in South Korea(공저), 회사법의 해부(공역)
“순환출자의 법적 문제”, “주주간계약의 실태와 법리”, “회사의 분할합병과 권리의무의 승계”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