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2011. 9. 5.
합리적 장애평가기준의 개발은 한국 사회가 우리 의학계에 던진 오랜 숙제였다. 이 작업은 사회가 의학계에 진지하게 요구한 사회기준설정 의제에 대한 의학계 전체의 의견을 결집한 답변이자 동시에 사회를 향한 의미심장한 약속이다. 10년 이상의 천착과 집단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이룩한 결정(結晶)이며, 반성적 성찰을 통해 의학계가 사회의 작동원리를 만들어 가는 역할의 수행 선언이기도 하다.
사회의 작동원리는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사회는 생산성과 공정성이 작동하는 체계를 갖는 것이다. 의학 분야의 역할은 사회의 구성원들의 건강을 유지시킬 수 있는 학문 체계와 전문성을 사회에 맞도록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리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의학전문가들은 최소한 임상의학 실천의 측면에서는 가히 상당한 수준 이상의 업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학과 의료의 생산성이 사회 전체의 지도적 선도집단의 역할로 민족국가의 경제적 위치를 상향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고, 사회가 공급하는 청소년 인재들의 수준에 걸맞느냐를 평가한다면 주저할 부분이 있겠으나, 의학전문가 집단에 부과된 역할의 상당 부분은 썩 잘 수행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의학 분야 전문가에게 한국 사회를 포함한 선진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기능 중 대단히 중요한 기능은 사회에서 정상적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건강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회의 정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어느 정도 부족한지를 객관적으로 평가·검증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과정을 반영하여 그에 상응한 대접을 할 수 있으니, 의학 전문가 개개인들은 개별적 입장에서 의뢰받은 평가에 전문성을 개별적으로 발휘해 왔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 사회 등의 기준을 암묵적으로 준용하거나 전문가 개개인의 전문성으로 사회의 여러 필요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의학전문가의 집단적 노력에 의한 한국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모든 경우의 장애현상과 기능을 평가할 수 있는 체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개별 전문가들과 학회들은 각 정부 부처의 수요와 손해보험협회 등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여 왔다.
1930년대에 미국인 맥브라이드가 만든 장애평가기준을 해석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을 나름대로 발전시켰고 노동부가 산재보험을 도입하면서 그 목적에 맞도록 공무원에 자문하여 그 기준을 설정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보건복지부가 장애인 복지서비스를 개시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정부의 자문에 반응해 온 것이다. 행정부의 10여 개 부처에서 약 20개 가량의 서로 다른 법률 등에서 따로 정한 장애평가기준은 지난 4~50여 년간 압축성장해 온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것은 의학전문가들의 집단적 전문성의 결집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이에 많은 의학 전문가들이 합의를 거쳐 새로운 통일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으나 결실을 맺기까지는 여러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의학 전문가들 중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선구적 문제의식을 가진 모임은 한국배상의학회였다. 이 학회는 대한의학협회와 함께 1990년대 초반까지 장애평가기준 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무르익지 못한 사회 분위기로 체계정비작업은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 후 사회의 요구에 따라 2000년 초반 국무총리실이 정비의 필요성을 느끼고 시도하였으나 이 또한 진행되지 못하였다. 다수의 의학 전문가들의 반성적 성찰이 무르익을 즈음 배상의학회의 선도적 활동과 함께 신진 소장 학자들이 대한의료감정학회를 출범시키자 정부의 대응은 노동부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대한의학회가 일부 의학 전문가들의 산재보험의 장애평가체계의 합리화 노력을 받아들이자 노동부가 공식적으로 이를 포용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보건복지부는 한국장애평가기준 개발을 국가사업으로 승격시켜 의학 전문가의 필요보다는 사회에 필요에 대응하는 장애평가기준개발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2006년 노동부를 시작으로 2007~2010년 보건복지부, 2009년 대법원, 2010~2011년 국토해양부와 법원행정처 등이 발주한 연구의 모든 결과를 대한의학회가 집대성하였다. 그 결과 약 200여 명의 의대교수 등 전문가가 5년 이상의 개발 연구를 진행하고, 장애인과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한 공청회 등을 통하여 집단의사결정을 거친, 대한의학회의 장애평가기준과 그 해설이 태어나게 되었다.
2006년 초 연구를 시작으로, 대한의학회는 한국형 장애평가기준을 개발하고자 3년 이상 지속적으로 연구진행을 추진하여 초판을 개발하며, 이 기준이 한국 실정에 적합하고 학문적 전문성과 가치중립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정하였다. 또한 정부(보건복지부 등)와 사법부 등과의 협력도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대한의학회는 각 회원 학회에 연구원 추천을 의뢰하였으며, 한국 사회에 적합한 장애평가기준 개발 연구에 참여할 전문가 약 200여 명을 추천받아 강화도 워크샵을 시작으로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강화도 워크샵에서 미국의학협회의 영구장애지침 체계를 원용하여 전신장애율을 선정하되 한국 사회에 적합한 가치중립적인 체계를 만들기로 기본원칙을 설정하였다. 더불어 의견이 대립하는 사항에 있어서 고문·자문위원 등의 의견을 수렴하기로 하였다. 각 장애영역별 전신장애율 선정에 있어 부각된 주요 쟁점사항은 상지장애와 하지장애의 비율 설정, 통증장애의 수록 여부, 중추신경계장애와 정신 및 행동장애 간의 관계 설정 등이다.
연구 초기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인식 때문에 하지장애가 상지장애에 비해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의학과 사회 인프라 발전에 따라 의학적인 관점에서 하지장애보다 상지장애가 발생될 경우의 생활의 제한 등 상지장애의 전신장애율이 더 높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사회적 인식과 의학적 관점의 간극을 축소하기 위한 의료진 대상의 설문조사 및 연구진 사이의 수차례 회의 결과 상지장애와 하지장애의 전신장애율의 논란은 단계적으로 5:5를 거쳐 6:4로 최종 결정되었다.
통증장애의 수록 여부에 있어서, 객관적인 검사 결과에 관한 이견 및 이로 인한 평가방법의 인정에 대한 이견, 통증장애 인정에 따른 사회적인 부작용(등록 장애인 부정 수급 등) 등을 우려하여 장애평가기준 마련에 관련 학회 관계자들 및 연구진 사이의 이견이 나뉘었다. 통증의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기준에 대한 논란에 대해 국제통증연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ain; IASP)의 기준이 객관적이라는 학자군과 연구용이므로 임상에 직접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하여 객관성 확보가 어렵다는 학자군으로 나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학협회 영구장애평가지침 5판과 6판 중 택일하자는 논의와 함께 독립적으로 새롭게 만들자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관련 학회 관계자들 및 연구진 간의 2년여 동안 10여 차례의 회의 그리고 원로의학 전문가를 모신 고문자문회의를 거치는 진통을 통해 최종 조율한 결과, 통증장애 중 비교적 객관적인 검사 및 평가결과의 활용이 가능한 복합부위통증장애의 경우만으로 범위를 한정하며, 미국의학협회 영구장애평가지침 5판의 기준을 상지장애와 하지장애의 세부 구성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같은 양상의 정신(감정) 및 행동장애의 전신장애율 선정방법이 중추신경계장애와 정신 및 행동장애에서 각각 평가할 수 있기에 중추신경계장애와 정신 및 행동장애를 담당하는 팀 간의 최대 전신장애율 선정에 이견 차이가 컸다. 정신장애인 간병의 어려움에 대한 인식 등 우리나라의 여건을 고려하여 정신(감정) 및 행동장애를 기질성 뇌병변에 의한 장애는 중추신경계장애에서, 비기질성 뇌병변에 의한 장애는 정신 및 행동장애에서 평가하도록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또한 이 두 가지로 구분한 평가결과 및 타 장애영역과의 형평성을 감안하여 기질성 뇌병변으로 평가할 경우 정신 및 행동장애로 평가한 전신장애율 결과의 80%만 인정하고, 비기질성 뇌병변에 의한 정신 및 행동장애의 전신장애율은 최대 전신장애율을 최종 75%로 조정하였다.
이 외 미국의학협회의 영구장애지침을 근간으로 하여 심장장애는 장애인복지법의 기준을, 외모피부장애는 산업재해에 의한 장애평가기준 등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장애평가기준을 반영하고, 중추신경계장애, 선천성 심장장애 등 일부 영역은 소아에 대한 평가기준을 추가하여 우리나라에 적용함에 현실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산업재해보상이나 자동차사고 배상 또는 손해배상 사건에 있어 배상이나 보상의 기준은 일반적으로 신체장애율이 아닌 노동력상실률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맥브라이드 장애평가기준에 있는 직업에 따른 노동능력상실률을 이용해 왔지만, 맥브라이드 방식의 신체장애평가는 물론이고, 직업에 따른 노동능력상실률 또한 우리나라 현실에 맞지 않는다. 이번 연구에서 직업에 따른 노동능력상실률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직업에 따른 노동능력상실률 평가 방법을 참고하여 우리나라에 적합한 방법을 고안하였다. 우선 우리나라의 표준직업분류에 따라 직업을 분류하였고, 한국직업사전과 산업의학 전문의들의 경험 등을 토대로 직업군을 분류하였다. 이 방법은 대한의학회 신체장애율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장애 종류가 각 직업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따라 노동능력상실률을 더해 주었다. 노동능력상실률 지수는 1부터 7까지의 값을 가지며, 지수 1은 신체장애율과 동일하고, 이는 장애가 직업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고, 7은 제일 중요함을 의미한다. 직업에 따른 노동능력상실률은 신체장애율이 아주 낮거나 높은 곳에서는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신체장애율 50% 부근에서는 최대 18%까지 차이가 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전문가들의 이러한 열정과 헌신으로 대변되는 극도의 의견합의의 고통이 없었다면 이 기준은 이렇게 제시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이 기준은 필요에 따라 주기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할 것이다. 그때마다 대한의학회 산하의 학회들이 다수 참여하여 과학적으로 타당하며 사회적으로 실효성을 갖는 기준으로 개선되어 나갈 것이다.
이 기준은 각 전문가 간의 치열한 논쟁과 합의를 통해 도출된 것으로 장애인복지 급여, 산업재해 보상, 교통사고 배상, 민사 및 형사소송 등에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장애평가기준은 장애평가 결과에 따른 이해관계, 장애평가의 복잡성, 노동능력상실률과 신체능력상실률 개념 등의 혼재, 너무 많은 평가기준, 세부규칙이나 규정 미비, 장애평가교육 결여, 표준화 작업 부재 등 여러 문제점을 조정해 왔다. 대한의학회 장애평가기준은 이러한 문제점을 현저히 개선한 명실상부한 한국의 표준적인 장애평가기준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또 이 기준은 각 법률에서 제시한 장애평가기준의 기본 지침으로도 활용 가능할 것이며, 의사들에게는 공정한 장애평가에 관한 교과서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또 법관들이 사회문제(분쟁)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할 때 위원회에서 합의한 이 기준을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에 기여한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몇 분들에게는 특별히 기록을 통해 감사드리고 싶다. 노동부의 국장으로 재직 중 대한의학회와 산재장애평가 개선 공동 작업에 도움을 주신 이상석 님께 감사드린다. 당시 고윤웅 대한의학회장님과 김건상 차기회장님께서 이 작업을 적극 지지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그리고 장애평가기준의 정립이 장애복지전달체계의 기본임을 파악하고 장기간의 연구를 결정·지원해 준 당시 노길상 국장, 김강립 과장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우리나라 최초로 약 200여 명의 연구원이 참여하는 대한의학회의 대규모 연구사업은 정부차원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007년 3월 2일 강화도 워크샵은 우리나라 장애평가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대법원에서도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으로 격려해 주었다. 함윤식, 고범석 판사의 지원 또한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우리나라 장애평가 분야 도입을 위해 의학계, 법조계, 보험계의 협력으로 세워진 배상의학회의 노력을 이어받아 장애평가기준 정립 작업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실천해 온 이경석 교수(대한의학회 장애평가이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장애인평가 체계의 난맥상에 우려를 피력하면서 우리나라의 통일된 장애평가기준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체계정립의 서원을 평생의 보람으로 삼았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그를 도와 이 체계를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이경석 교수 이외에도 이 책의 대표저자로 기록된 박동식, 원종욱, 정양국 교수와 집필자와 200여 명의 연구참여자 모두의 5년 여에 걸친 기여가 없었다면 이 기준과 책은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한의학회 김성덕 회장님과 최종상 부회장님께 감사드리며 오랜 숙제를 내려놓는다. 끝으로 출간을 결정하고 꼼꼼한 편집과정을 담당해 준 박영사의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2011년 8월
손 명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