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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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과 사회통제 [2007년 우수학술도서]
형벌과 사회통제 [2007년 우수학술도서]
저자
한인섭
역자
-
분야
법학 ▷ 형법
출판사
박영사
발행일
2006.01.15
장정
페이지
403P
판형
크라운판
ISBN
89-7189-618-3
부가기호
강의자료다운
-
색도
정가
20,000원
중판 2007. 9. 30.

1978년 9월, 내 대학 2학년 때다. 자정을 넘어 집으로 찾아온 형사의 손에 이끌려 임의동행을 강제당했다. 관악경찰서에 도착한 뒤 보호실에 구금되었다. 새까만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의 바닥에는 먼지 덮어쓴 매트리스 한 장이 놓여있었다. 담요와 베개 따윈 없었다. 뜬 잠을 새우고 취조가 한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손찌검과 몽둥이도 날라들었다. 열이틀동안의 관행화된 불법의 보호를 받았다. 즉결심판에서 판사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구류를 선고했다. 실려 간 곳은, 관악서 부속의 구치소였다. 그 곳은 검사에게 넘겨지기 전의 피의자의 구치와 구류 받은 자를 위한 유치장 역할을 겸했던 곳이다.

유치장 문을 들어선 첫 느낌은―냄새였다. 밀폐공간의 퀴퀴한 습기에 섞어 오물냄새가 배어 있었다. 기묘한 공간배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운데가 빈 반원형의 건물인데 원주 쪽에 쇠창살이 있고, 그 곳에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검신절차가 개시되었다. 바지 벗고 쪼그려 뛰기 시키면서, 문신 있는 자는 따로 챙겼다. 조금만 느리거나 반항적이면 매질이 날라들었다. 방 배치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소위 잡범과 분리 수용되었다. 유치장 안은 약간 어둑했지만, 밤에도 불을 끄지 않은 불야성이었다. 수용자는 이름 아닌 번호로 호칭되었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수시로 인원점검이 반복되었다.

각 거실에는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다. 주먹질하다 잡혀온 또래의 젊은이들은 우리 학생들보다 훨씬 느긋하게 적응하는 듯이 보였다. 리어카 좌판을 벌이다 단속반에 걸린 아주머니는 몇 천원이 없어 몸으로 때우고 있었고, 보다 못한 교도관들이 사비를 털어 석방해주는 온정도 보였다. 자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안경까지 압류당했기에, 눈앞의 사물은 흐릿한 윤곽으로만 다가왔다. 방에는 무기력과 무료함, 불안감과 위축감이 지배했다. 그를 달래기 위해 교도관들은 방 대항 노래자랑을 시켰는데, 나훈아 남진은 거기 다 있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가족과 상면하는 것은 반갑고도 송구스러웠다. 좁고 길게 난 창 사이로 보이는 관악산 자락엔 가을이 얼풋 느껴졌다.

짧은 기간이지만 법무부 시계는 너무나 느렸다. 순환이 빠른 유치장/구치소에서 곧 우리 일행은 왕고참이 되었다. 구류 25일을 채우고 나오자마자 가족들은 두부를 떠먹였다. 때는 10월 하순, 다시 찾아간 교정의 노란 은행잎들, 따사한 늦가을, 그리고 친구들과의 재회는 지금도 잊지 못할 풍경이다.

내 체험은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독재반대의 학생데모 속에서 대학은 교도소와 늘 붙어 있는 셈이었다. 캠퍼스에 가장 가까운 건물은 동양최대의 파출소라 자랑하는 곳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얻어맞고 잡혀가고 처벌받았다. 법도 불법이었고, 불법은 또다른 법적 관행이었다. 교도소 행을 막기 위해 은사와 어른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알았다. 만나는 사람들은 시대가 변할 것이라며 힘을 돋구어 주었다. 그 때의 낙인은 사법시험 3차에까지 따라와, “국가관 불량”이란 명목으로 불합격처분을 받았다.

학부를 마치면서 법을 학문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러한 불법과 동거하는 법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각오를 세웠다. 그래서 형사법을 택했다. 그러나 교과서상의 형법은 핍진한 역사와 현실이 빠져있는, 개념조작의 기술이었다. 억압적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법학은 창조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작업은 늘 우회로를 통한 설득의 길이기에, 창조를 위해서도 서구의 지적 작업을 뒤적여야 했다. 그러한 도상에서 비판법학을 만났고, 비판범죄학을 만났다. 석사과정에서는 외롭게 탐색한 셈이고, 박사과정 시절은 선후배들과 함께 그래도 큰 방향은 잡아내고 불철주야 공부했다. 가난한 대학생이 돈버는 직장 대신 대학원을 선택했다면, 그만한 내적 근거와 외적 성취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체험한, 온 촉수와 신경을 건드린 그 “기묘하고 비인간적인 감옥시설”의 인상은 설명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설이 왜, 어쩌다가 생겨났을까. 내 개인의 호기심에 그칠 것이 아니었다. 동시대인들이 대학과 감옥을, 혹은 생업과 감옥을 왕복해야 하는 시대에, 감옥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다. 형사법의 적용대상자가 주로 감옥살이한다면, 형법 전공자는 그 감옥살이의 현장에 마땅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학업을 마다하고 ‘현장’에 투신한 결단들이 넘쳐났던 그 시대에, 감옥도 한 ‘현장’이 아니던가.

국적불명의 법학이 아니라 ‘조선김치냄새 나는’ 법학을 하려면, 주제는 당연히 우리의 감옥이어야 했다. 감옥을 그 세부에까지 들어가, 미시사를 통한 거시적 조망을 꾀한 외국의 역작들을 보며 그러한 생각이 더해졌다. 그러면 어떻게? 박사논문을 생각할 때, 애초의 소망은 한국의 근대감옥의 원형에 해당하는 서대문감옥(형무소)의 역사를 해부하자는 것이었다. 그 곳은 1909년 설치될 때부터 잡범들과 함께, 수많은 독립운동가, 사회개혁가들이 투옥된, 민족의 애한이 스며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전제가 있었다. 제대로 쓰려면 그 감옥에서 작성된 수많은 원자료를 입수할 수 있어야 했다. 1980년대 암흑적 분위기는 그러한 자료접근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석·박사과정의 속성상 새로운 개념과 지식을 흡수하는 공부에도 바빴다. 그리하여 근대감옥의 출발점을 형성한 영국과 미국의 경우를 중심으로 감옥의 형성과 변모를 사회통제의 시각에서 접근했다. 이것이 내 박사논문이고, 이 책 제1부의 골자를 이룬다.

교도소는 일반에게 차단되어 있다. 죄를 짓지 않은 자에게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그렇다고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 죄를 지을 수 없는 일. 한 가지 방안으로 연구목적의 자원수형자(volunteer prisoner)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나라가 있는데, 감옥을 치부로 여기는 독재국가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할 수 없이 우회로를 택해야 했다. 우리 교도소와 대척점에 있는 ‘교정선진국’ 스웨덴의 교정시설을 속속들이 알고 싶었다. 새로운 전망을 얻고 구체적인 실태를 알고 싶어서였다. 북구의 겨울, 해짧은 낮에는 스톡홀름에서 1~3시간 걸리는 교도소를 방문하고, 긴 밤을 이용하여 낮에 메모한 것과 기억을 일깨워 정리했다. 스웨덴의 구치소, 개방교도소, 노동교도소, 그리고 중경비교도소를 방문하면서, “그런데 교도소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던 한 이국 방문자의 말이 실감으로 왔다. 이것이 제2부의 첫 부분이다.

또 다른 겨울에는 미국의 각종 교도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로키의 알카트라즈라 불리우는 가장 엄중한 교도소로부터, 아리조나의 텐트형 교도소 등 다양한 교도소를 살펴볼 수 있었다. 교도소 안을 들여다보니 피부색깔부터 달랐다. 교도소 안의 미국은 백인국가가 아니었다. 보수적ㆍ억압적 형사정책이 지배해온 최근의 미국은 갈수록 과밀수용으로 치달리며, 그와 함께 시설내 처우와 인권이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모습이 보여진다. 시설 면에서는 천국에서 지옥까지 다양했고, 보안은 전산화되고 있지만, 문제는 소내 인간관계의 질적 측면의 열악성이었다. 시민들의 범죄자에 대한 불관용이 억압적 교정정책을 선호하게 되고, 그런 정책기조는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뀐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그런 모습을 제2부의 둘째 부분에 담았다. 이렇게 제2부는 스웨덴과 미국의 경우를 통해 현대 교정의 실상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행형개혁을 위한 시사를 얻으려고 한 것이다. 제1부가 역사적 연구라면, 제2부는 정책적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 교도소로의 진입은? 면회실까지의 접근만 가능했을 뿐 더 이상의 진입은 불가능했다. 다만, 학위논문을 쓴 직후인 1990년 겨울, 서대문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 채 서대문감옥은 사적지화를 위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주민들의 민원을 수용하느라 외벽의 대부분을 철거하는 등, 원형의 상당부분이 훼손되었다. 더 훼손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원래의 모습을 느껴보고자 했다. 감방문을 닫은 채 두시간동안 생각해보기도 했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삶의 편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야한 사진들을 보면서 남성만의 세계에서 무료함을 이기기 위한 노력을 더듬을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감방에 새겨진 ‘희망’이란 두 글자였다. 시멘트를 뚫고 자라난 야생초는 감옥이 ‘그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현장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낡은 일제 관사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던 사형장에 들어서 숙연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지금 서대문감옥은 사적지가 되어 있다.

교도소로의 학문적 진입은 1998년 이후에 가능했다. 교도소에 6년 이상 살았던 양심수(prisoner of conscience) 출신의 대통령이 되면서, 교정개혁에도 탄력이 붙었다. 대구, 청송, 안동, 대전, 천안, 안양의 교도소를 방문하고 교정직원들과 대화하면서, 시설의 모습을 가능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애썼다. 대전교도소에서는 비전향장기수를 조우하기도 했다. 아마 그들이 만난 첫 비법무-민간인이었을 것이다. 천안개방교도소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로 처벌된 눈빛 맑은 청년들과 대면했다. 천안소년교도소에서 청소년들의 모습이 가슴에 박혔다.

돌아보면서 특히 감옥생활을 가장 오래한 무기수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어떻게 그 긴긴 세월을 견디고 살아갈까, 그들에게 형벌의 효과는 무엇이고 긴 세월을 보내고 석방될 때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후속연구로, 한국의 무기수를 상대로 면접조사와 설문조사를 대규모로 실시할 수 있었다. 무기수는 죄질로 볼 땐 용서할 수 없는 흉악한 살인범이지만, 교도소 내에서 볼 때 절대다수의 인간은 개선불가능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무기수들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설문취지를 설명하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맡은 서울대의 형사정책 강의에서는 학생들과 교도소 참관을 정례화하고 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기도 하고, 비록 주마간산격으로라도 돌아보면 학생들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이 온다. 공주 치료감호소에 있는 정신장애인들의 태도와 눈빛을 보면, 벌써 인간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소감을 말하다보면, 짧은 시간에 같은 코스를 걸었지만, 서로 보고 느낀 게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게 된 마지막 계기는 2005년도 봄 학기에 펜실베니아 로스쿨의 초청으로 필라델피아에 와서였다. 펜실베니아 주를 건설한 주역은 퀘이커 교도였다. 윌리엄 펜의 인도 하에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와 박애주의적 실천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인디언과도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창했다. 그들의 박애적 노력의 한 절정은 수형자의 내면적 각성을 위한 시설로서 근대감옥을 축조해낸 일이다. 1829년 완성된 필라델피아의 동부주립감옥의 건축과 그 운영은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유럽 각국에서 시찰단이 조직되어 필라델피아에 왔다. 사절단들이 남긴 생생한 보고서는 각국의 근대감옥을 실체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감옥은 150여년 동안 사용되다 노후화를 이기지 못해 문을 닫았는데, 최근 사적지로 조성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의 고문박물관, 로텐부르크(독일)의 형벌박물관도 있지만, 필라델피아에서는 감옥 전체를 박물관화한 셈이다. 이 감옥에 입장하여,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근대감옥의 건축과 감방과 수형자의 생활을 체감할 수 있었다. 박사논문을 쓸 때 미진했던 부분과 남은 의문점들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느낌만으로 글을 완성할 수 없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중앙도서관은, 감옥논쟁의 중심지의 도서관답게, 19세기와 20세기의 관련 자료들로 빼곡했다. 이 원사료들을 대하면서, 많은 경우 2차문헌의 인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80년대의 개인적ㆍ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박사논문의 내용을 처음부터 재음미하면서, 이 책의 제1부를 다시 쓸 수 있었고, 근대감옥 및 현대행형의 흐름을 정리하는 글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역설적인 도움부터 이야기해보자.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나를 유치장에 넣지 않았더라면 이런 주제가 나를 사로잡았을까. 전두환 정권은 적어도 두가지 기여를 했다. 사법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면접시험에서 나를 불합격시킴으로써 법학자의 외길 정진을 하도록 했고, 석사장교 제도를 만듦으로써 선배 세대보다 일찍 학위논문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 셈이다.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의 운명과 삶을 예기치 않게 강제했던 그 세력들도 감옥에 갔다. 동양최대라던 교도소와 보호감호소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여러분은 감옥에 절대 가지 마시오”라고 석방인사를 했을 때, 그것은 한국현대법사의 가장 역설적인 장면의 하나였을 것이다. 역설은 그 뿐 아니다. 감옥은 나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감옥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감옥 체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역대 대통령 중 3명은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한 적이 있으며, 정치인들은 감옥 담장 위를 걷고 있다는 말이 지금도 통용될 지경이다. 감옥에 대한 관심은 근대 이후 한국인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감옥이란 무엇인가”는 여전히 본격적인 이론적 질문거리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정식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우선 은사이신 이수성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어려운 시대에 부정의한 제도에 희생당하는 제자들과 마음을 같이하면서, 그들을 빼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제도적 장벽에 막힌 제자들에게 “인생을 길게 보고, 원대하게 설계하고 살게”란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심영희 교수님은 본 연구의 모태가 된 저작들을 입수하여 나눠주시고 대학원 시절의 공부를 이끌어주셨다. 공부는 학교에서 그치지 않고, 교수님의 댁에까지 이어졌다. 치열했던 대학원 공부모임을 함께 이끌었던 이철우 교수는 유학을 떠난 뒤, 내가 요청하는 자료를 공들여 찾아주고, 아울러 학계의 동향을 알려주었다. 심헌섭, 신동운 교수님은 생경한 감정과잉의 주장을 여과시켜 주려 애써 주셨다. 이승호 교수와 같은 주제를 토론하며 지낸 시절의 추억도 소중하다. 아울러 감옥연구에 필수적인 현장의 길잡이에 도움을 준 스웨덴, 미국, 한국의 행형당국 및 유관 기관에도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2005년 12월
한인섭 씀
1959년생으로 서울대 법대의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법학박사를 받았으며, 형법과 형사정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배심제와 시민의 사법참여』, 『한국형사법과 법의 지배』, 『권위주의 형사법을 넘어서』 등이 있으며, 『정의의법, 양심의법, 인권의법』, 『5·18,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 『성적 소수자의 인권』 등을 펴냈다. 법률에세이로 『부메랑 던지기』, 번역으로 『범죄와 형벌』(C. 벡카리아 저)이 있다. 법과사회이론학회 및 한국형사정책학회,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의 활동에 관여해왔고, 최근에는 사법개혁위원회 및 법무부 정책위원으로써 제도개혁의 실무와 이론화에 관여하고 있다.
제1부 근대감옥의 역사적 형성과 사회적 기능 - 영국과 미국의 제도를 중심으로

제1장 감옥(교도소)이란 무엇인가
제2장 이론적 검토
제3장 절대주의국가와 징치감의 발전
제4장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사회통제 방식의 변화
제5장 사형ㆍ신체형ㆍ유형ㆍ공개형의 쇠퇴
제6장 감옥 개혁론과 개선이데올로기
제7장 모델감옥과 행형방식의 발전
제8장 근대감옥의 규율과 통제: 그 기법과 정당화
제9장 감옥과 사회통제, 자유주의 국가
제10장 교정적 처우와 사회통제
제11장 결 론


제2부 현대 행형의 실제 - 스웨덴과 미국의 제도와 운영을 중심으로

제1장 선진교정의 현장: 스웨덴의 교도소와 행형실태
제2장 미국의 교정시설과 그 운용상의 딜레마
제3장 미국 수감인구의 폭증현상, 그 원인과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