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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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 현대 태권도의 종합설계자
신간
이종우, 현대 태권도의 종합설계자
저자
서완석, 이종관, 김영선
역자
-
분야
스포츠/디자인/예술/건강취미
출판사
박영사
발행일
2021.09.30
개정 출간예정일
페이지
280P
판형
신A5판
ISBN
979-11-303-1400-6
부가기호
03990
강의자료다운
-
정가
20,000원

초판발행 2021.09.30


1990년대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연도와 계절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이 말은 그와의 만남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 나눈 대화의 의미가 강렬한 나머지 그 외의 것을 기억하는 것은 무의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강렬한 빛이 내게로 비칠 때 주위의 모든 것을 삼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까. 아무튼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였던 그를 필자는 국기원에서 다른 일을 취재하던 중 만나게 됐다. 어릴 적 태권도를 수련한 필자는 국기원은 늘 성소 같은 장소였고 다소 말수가 적었던 그는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현재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개혁’이란 화두는 모두의 관심사였다. 평소 태권도 개혁을 주제로 많은 기사를 썼던 필자는 태권도 경기 규칙 제정을 주도했던 그에게 불쑥 퉁명스런 질문 하나를 던져봤다.
“태권도는 밟을 태와 주먹 권자를 쓰는데 왜 주먹 점수에 야박합니까?” 그는 망설이지도 않았다.
“주먹 점수를 다 주면 태권도가 망합니다.”
이 무슨 소린가.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복싱이 손기술을 쓴다면 태권도는 발기술 위주로 발전된 스포츠입니다. 주먹 점수를 제대로 다 주면 태권도는 손발을 다 사용하는 어정쩡한 스포츠가 돼 태권도만의 매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래도 주먹이 발보다 빠른데 주먹 점수를 안 주면 수련을 등한시 해 태권도 수련생의 무력(武力)이 약해질 것입니다.”
필자의 반대 논리에 그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주먹 점수를 다 주면 한국 태권도가 설 땅이 없어져요.”
그의 대답은 서양인들의 팔다리가 모두 길어 그렇지 않아도 한국 선수들이 불리한데, 주먹 점수까지 다 주면 한국 선수들의 국제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얘기였다. 스포츠 태권도를 설계한 그의 말에서 ‘애국심’이 숨겨져 있어 놀라웠다.
그날 그와 나눈 대화 내용에는 몸통 보호대가 더욱 개량돼야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선수들이 돌려차기를 할 때 허리부분이 무방비로 노출돼 허리 부상이 염려된다는 것이었다.
‘현대 태권도의 설계자’답게 그는 국기원을 찾아오는 이들과 담소하기를 즐겨했고, 대부분이 태권도 기술과 경기 규칙 개혁이 화두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확신을 갖고 추진한 일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단호함을 보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일생을 태권도와 더불어 살았다. 그는 태권도를 개인의 수련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태권도에서 스포츠의 속성을 발견했다. 그 때가 1950년대 중반쯤이었으니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할 따름이다. 태권도가 겨루기로 특화된 스포츠로서 전국체육대회 종목이 되면서 태권도에 대한 주위의 불편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전국적인 보급과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가 바로 그였다.
전국체육대회 종목이 되기 위해서는 선수 안전을 위한 호구 제작, 합리적인 판정을 위한 공정한 경기 규칙 제정 등 풀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지도관 관장의 지위를 활용해 지도관에서 이를 앞장서 만들었다.
전국에 수십 개의 관이 난립해 의견수렴이 힘들 때 그는 관 통합을 앞장 서 부르짖었다. 그의 활약으로 관이 통합되어 대한태권도협회로 단일화했다.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영입한 것도 그였다. 1971년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외교관 출신 김운용을 앞세운 태권도계는 이듬해 국기원을 만든 뒤 1973년에는 첫 세계선수권대회와 세계태권도연맹(WTF?2017년 WT로 개칭)을 창설해 세계화의 기틀을 닦았다.
뒤에서 이를 연출한 일등공신이 바로 그였다. 그는 영어를 잘 못했지만 세계태권도연맹 창설 사무총장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태권도 인맥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김운용도 그를 앞세워 세계 무대를 조금씩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획하고, 김운용이 결정하면, 엄운규가 실행하는 태권도 행정의 ‘황금의 삼각분할’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세계화도 급물살을 탔다. 전 세계 대륙별 대회와 연맹이 만들어지고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에 가입한 뒤 1980년에는 IOC 승인 종목이 되면서 태권도는 세계화의 기틀을 닦았다. 마침내 1994년 태권도가 가라테, 우슈 등 유사 동양 무술을 제치고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데는 오로지 스포츠 태권도란 외길을 개척한 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가라테와 차별성을 꾀하기 위해 한국형 품새 개발에도 애썼다. 또 전통주의에 입각한 태권도 역사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초창기 태권도 역사 정립에 그만큼 애쓴 이도 드물다.
스포츠화한 태권도, 세계화한 태권도에 대해 ‘현대 태권도’란 이름을 붙일 때 그는 ‘현대 태권도의 종합 설계자’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가 바로 이종우다.
이처럼 스포츠 태권도의 조기 정착과 전국적인 보급, 그리고 세계화,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관 통합 및 품새 제정, 역사 정립 등 태권도 발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그에 대한 생애사를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의 전 생애가 곧 태권도 현대사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화려한 태권도 인생에 비해 남아 있는 관련 사료가 적다는 것은 생애사 글쓰기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줬다. 함께 활동했던 김운용 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가 여러 권의 자서전을 포함해 다양한 글쓰기로 많은 자료를 남긴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이런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아직 생존해 계신 원로급 태권도인들의 자료를 보존하고 기록으로 남길 것을 국기원이나 태권도진흥재단에 권하고 싶다.
이종우 원로 생애의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메우기 위해 자료 수집은 물론 그를 기억하는 많은 분들의 인터뷰 정보가 필요했다. 생존 당시 영상물이나 녹취록도 귀중한 사료가 됐다. 생애사가 근거 없는 영웅담으로 흘러서는 안 되기에 집필진은 후학을 위해 본문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밝히기로 했다. 이 책이 논문처럼 다소 경직된 이유다.
태권도 사료를 만들기 위해 10여 년 전 그의 생존 시 영상 기록물을 만든 태권도진흥재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태권도를 취재하며 특히 그와의 소중한 인터뷰 녹취록을 제공해준 서성원 기자도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줬다. 귀중한 사진과 증언을 해주신 재미 김병수 관장님, 임충희 마루기획 대표님과 지도관 사무처 신동수 박사님, 이종우 원로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생애사 기획을 맡은 국기원 연구소 박종범 연구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책의 발간은 더욱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2021년 9월
책임집필자 서완석

책임집필자 서완석
- 스포츠저널코리아 편집장
- 전 국민일보 체육전문기자(이학박사)
- 전 대한태권도협회·태권도진흥재단 이사

공동집필자 이종관
- 아시아태권도연맹 품새위원장
- 전 국기원 지도자연수원 연수처장
- 전 육군사관학교 체육학처 태권도 강사

공동집필자 김영선
- 연세대 태권도부 및 국제 태권도부 지도사범
- 연세대 글로벌인재대학 강사(체육학박사)
- 국기원 태권도 역사 및 정신 강사

글을 시작하며… 1

01

무예를 수련하며 지도자의 꿈 키워
제1절  조선연무관 권법부에서 무예 입문 7
1. 손병희 선생 행랑채에 살아  7
2. 해방 후 보이스카우트 활동  9
3. 경신중고 시절 조선연무관 권법부 입문  10
제2절 타고난 신체조건, 탁월한 무예실력 18
1. 스승 전상섭  18
2. 무예를 함께 수련한 동료  24
3. 출중한 기량으로 최고 실력자로 부상  28
4. “두 스승을 섬길 수 없습니다.”  30


02

무도인에서 태권도 설계자이자, 행정가로
제1절 한국전쟁 중 무예단체 결성…‘조직가’ 면모 보여 35
제2절 조선연무관 권법부 계승, 지도관 창설 40
1. 한국체육관 사범 취임  40
2. 한국체육관을 지도관 거점으로  45
3. 전북 지도관의 맹활약  47
제3절 대한태수도협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 51


03

이종우의 역사적 선택: 최홍희와 김운용
제1절 최홍희와의 대립 61
1. 최홍희는 누구인가  62
2. 최홍희의 등장과 이종우의 행보  67
3. 태권도계 주역으로 부상한 최홍희  70
4. 최홍희가 제도권에서 배제된 연유  73
5. 최홍희가 물러난 이후  75
제2절 태권도계의 김운용 영입 78
1. 김운용 이전과 김운용 이후  78
2. 김운용 영입 당시 시대적 배경  79
3. 뉴욕 조시학 사범, 김운용을 이종우에게 천거  81
4. 전계배, 이종우와 김운용 첫 만남 주선  84
5. 외교관의 꿈을 버린 김운용의 선택  87
6. 김운용의 4대 비전 제시  91
제3절 ‘평생 동지’이자 ‘라이벌’ 엄운규와의 관계 94
1. 운명적 만남  94
2. 협력 관계  96
3. 애증(愛憎)의 세월  99
4. 화해  103


04
 
현대 태권도의 종합 설계자 이종우
제1절 태권도 경기화(競技化)의 선도자  107
1. 태권도 경기화의 배경  107
2. 이종우의 발상의 대전환  109
3. 경기화의 시작…경기규칙 제정을 주도한 이종우  111
4. 최홍희, 황기 등 1세대들의 반대  116
5. 태권도 경기의 본격 추진  117
6. 호구(護具) 개발에 앞장 선 이종우  121
7. 태권도 경기화…얻은 것과 잃은 것  123
제2절 관 통합(館 統合)에 헌신 126
1. 관(館) 통합의 시초는 공동 심사업무  127
2. 이종우, 관(館) 통합에 가장 적극적  129
3. 마침내 관 통합…  이종우, 강원식, 이병로 등 노력의 결실  133
4. 관 통합에 관한 이견(異見)들  136
제3절 태권도 기술 통합 및 표준화의 선봉 139
1. 한국형 품새 제정을 주도  139
2.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직책, ‘기술심의회 의장’  147
3. 태극 품새 개발에도 나서다  150
4. 공인 태권도 교본 발간에도 앞장서다  155
5. 태권도 용어의 한글화에도 관심 기울인 이종우  157
제4절 교육 및 연구소 설치 163
1. 심사 내용의 표준화 추진  164
2. 대한태권도협회 강습회 주관  165
3. 세계태권도연맹 국제심판 교육  165
4. 국기원 연수원과 연구소 설치 추진  166


05
 
김운용과 이종우 : 태권도 세계화의 기수
제1절 국기원 건립과 이종우의 활약 172
1. 김용채의 국기원 건립 구상  172
2. 김운용 국기원 건립 본격 추진…이종우 건설본부장  176
3. 중앙도장에서 국기원으로 명칭 개칭  182
4. 국기원 엠블럼을 제정한 이종우  183
제2절 세계태권도연맹 창설과 이종우 185
1.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준비위원장 이종우  186
2. 세계화 전략…  세계선수권대회와 세계태권도연맹 창립에 공헌  188
3. 국제태권도연맹(ITF) 창설에도 관여한 이종우  191
제3절 김운용과 함께 나선 GAISF 가입 194
1. 세계화의 첫 걸음…GAISF 가입  194
2. 김운용을 보좌해 GAISF 총회에 참석  196
제4절 태권도 세계화와 이종우의 막후 역할 200
1. 정치외교는 김운용, 행정은 엄운규, 기술은 이종우  200
2. 지도자 연수원 부원장으로 7년 만의 제도권 복귀  205
3. 선견지명…전자호구 개발에도 앞장 서  207
제5절 올림픽 진입을 향한 거대한 발걸음 211
1. 뉴욕에서 태권도를 선보이다  211
2. 올림픽종목 채택 추진위원회 구성…   바빴던 1994년 벽두  216
3.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을 지켜본 이종우의 벅찬 감회  217


06
 
영원한 불꽃으로 남은 이종우의 태권도 열정
제1절 시련과 과오 225
1. 신군부에 짓밟힌 태권도  225
2. 71세에 국기원 연수원으로 복귀  228
3. 시드니 올림픽과 승부조작 파문  229
제2절 이종우의 태권도 역사관 그리고 논쟁 233
1. 전통주의는 1970년대 민족주의의 시대적 산물  234
2. 전통주의에 반기…정체성 혼란  237
3. 가라테는 일본 아닌, 식민지 오키나와 무술로 이해  239
제3절 정 많고 올곧았던 그의 인간미 242
1. 계파를 가리지 않는 천거(薦擧)와 등용(登用)  243
2. 명리(名利)에 초연(超然)했던 큰 사람  245
제4절 마지막 여정 248
1. 용퇴(勇退)의 때를 알았던 이종우  248
2. 불꽃같은 태권도 인생, 87세로 영면  250

이종우 원로 연보  254
참고문헌  258